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기에, 이제야 내 일을 찾았기에
▣ 양덕모 푸른책들 편집팀 대리

△ 양덕모 푸른책들 편집팀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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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회식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일찍 눈이 떠진다. 나는 살금살금 침대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빠져나간 내 무게만큼의 허전함을 눈치챘는지 곤하게 자던 아내도 눈을 뜬다. 이런, 몰래 나갔어야 하는데, 또 한 소리 듣겠군.
“왜, 이렇게 일찍?”
“응, 오늘 마감해야 할 외부 원고가 두 개나 있어서. 또 신간 보도자료도 써야 하고, 지금 진행하는 책 최종도 해야 하고, 또….”
“알았어, 알았어. 그래도 좀 적당히 해. 자기가 철인은 아니잖아. 그러다 몸 축나면 어쩌려고 그래.”
아내의 타박 섞인 걱정을 뒤로하고 집을 나선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나는 ‘워커홀릭’이다. 야근은 기본이고, 가끔은 휴일에도 일을 한다. 그렇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즐거운 워커홀릭’이다.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이 재미있다. 이 일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어떤 때는 미치도록 일을 하고 싶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기에, 이제야 내 일을 찾았기에 이 일이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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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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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빌빌거리고 있을 때,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작정 짐을 싸 상경했다. 학습지 회사 편집부. 그때 ‘편집’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한두 해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정도 편집밥을 먹었다고 느꼈을 때(지금 생각해보면 가소롭지만), 이건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단위로 빡빡하게 짜인 일정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없었다. 물론 그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일의 재미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내 책을 만들고 싶었다.
학습지 회사를 그만두고, 또 한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드디어 내 자리를 찾았다. ‘푸른책들 편집팀 양덕모.’ 그렇지만 내 자리를 찾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먼 길을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할 것이, 배워야 할 일이 많았다. 그때부터 나의 워커홀릭은 시작되었다. 근무 시간은 물론이고 야근, 휴일도 없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스스로도 이러면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잡아준 건, 내 사수였다. 푸른책들에 입사했을 때, 내게 단행본 일을 가르쳐준 이는 황송하게도 푸른책들의 대표이사였다. 내 사수, 신형건 사장은 참으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전직 치과의사, 시인, 출판사 사장. 일을 하느라 아직까지 결혼도 안 하고(음, 이건 확실하지 않다) 있는 진정한 워커홀릭.
내가 신형건 사장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일찌감치 등단했기에 아동문학판의 역사를 꿰고 있었다. 기회가 날 때마다 들려주는 아동문학판의 생생한 이야기들은 그 동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편집일을 놓지 않고 조사 하나까지 챙기는 그를 보면서 편집자로서의 꼼꼼함을 배웠다. 또한 편집자는 그저 교정을 잘 봐서 좋은 책을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기획부터 마케팅까지 총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나의 아둔한 머리를 깨우쳐준 것도 그였다.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좌충우돌 폭주하고 있던 나를 ‘즐거운 워커홀릭’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좋은 책을 만드는 즐거움, 이 일이 일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줬다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워커홀릭으로 살 것 같다. 야근은 물론이고, 가끔은 휴일에도 일을 할 것이다. 내가 기꺼이 워커홀릭을 자처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판에 박힌 말이지만, 내가 만든 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