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Editor's Cut 칼럼 목록 > 내용   2007년02월02일 제646호
출판 과외 모임

숨 좀 돌리며 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동업자들과의 끈끈한 인연

▣ 최세정 역사비평사 편집장


△ 최세정 역사비평사 편집장


편집자로서 나는 내 존재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저(역)자와 독자와 더불어 책으로 소통하고 또 인정받을 때가 아닐까 한다. 그럼 그 인정을 받기 위한 내 자산을 나는 또 어디서 얻어왔을까?

난 참 운이 좋은 편이다. 인복이 있어서 들어간 출판사마다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데다 훌륭한 ‘사수’를 만나 출판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 둘 있으니, 일종의 제도 교육의 장이라 할 수 있는 좋은 직장이 그 하나요, 나머지 하나는 일명 ‘출판 과외 모임’이다. 출판 과외 모임이라 칭하니 참 어색하기도 하지만, 여하튼 나는 지금까지 크게 세 개의 과외 모임을 거쳐왔다.

첫 직장의 상사들은 참으로 친절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저 말고 물어보라고 했지만 초보 편집자인 난 도대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몰랐다. 그 시절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조직을 만났으니, 그 이름하야 ‘출판비평모임’(출비). 당시 서울지역출판노동조합 산하조직이었던 이 모임에 대해 기실 난 빙산의 일각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미 선배들이 탄탄히 터를 일궈놓은 이곳에서 나는 S선배와 또래 친구 둘과 함께 교정교열 소모임을 했더랬다. 실제로 만난 것은 얼마 되지 않지만 첫 모임과, 종종 김치볶음밥을 시켜 먹고 조용하게 준비해온 자료를 읽던 그 따뜻한 찻집 풍경은 지금도 가슴 한켠을 따뜻하게 한다.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20대 중반의 이 모임이 첫 번째 과외 모임이었다면, 두 번째는 출비가 나우누리로 공간 이동한 다음 만든 ‘편집자모임’이었다.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이름의 이 소모임은 경력 3년차 전후의 후배들에게 선배들이 만들어준 소중한 자리였다. 모임의 좌장 격인 ‘옹’ 선배의 활약은 지금도 감사할 따름인데, 1년 넘게 진행된 ‘편집자모임’을 기획하고 실제 집행한 선배 덕분에 우리는 출판계의 내로라하는 분들의 산지식을 직접 듣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조금은 퀴퀴한 신촌 책사랑방에 모여 출판이 무엇인지, 편집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무슨 책을 만들 것이며 또 어떻게 만들 것인지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실제적인 내면의 성장을 이룬 시기였지 싶다. 사람이 좋고 일이 좋고 책이 좋던, 게다가 몸도 좋아 늦은 시간의 야근도 술자리도 모두 OK할 수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부터 뭉치기 시작한 ‘개띠’ 친구들은 지금도 다양한 출판 현장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고 있는데, 이들은 내가 지금까지도 편집자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움을 준 고마운 존재다.

세 번째 모임은 30대 초반, 새롭게 진용을 짜고 모인 ‘編’(편)이다. 기존 ‘편집자 모임’에서 함께한 사람이 반을 차지했는데, 사람이 은근히 많아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진행되기도 했던 이 모임은 아쉽게도 막판엔 흐지부지되듯 마감되었다. 물론 이 세 모임 말고도 회사 안에서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소모임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열정 하나로 뭉친 이들만큼 가슴에 깊이 남는 모임은 없다. 생각해보라. 대개의 출판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그런 곳에서 오로지 원고에 코를 박고 세상 돌아가는 것과 담을 쌓고 살 수도 있는 것이 편집자 생활이다. 그런데 톡톡, 이봐, 뒤 좀 돌아봐, 잠시 쉬어가면서 숨 좀 돌리면서 우리가 좋아하는 책 이야기 좀 해보자구, 말 한 마디 따뜻하게 건네주는 ‘동업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소중한가. 이들 동업자의 끈끈한 인연과 소통에 힘입고 있는 편집자는 아마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현업에서 힘차게 뛰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 또한 으으 힘을 내본다. 우리 이렇게 서로를 귀감 삼아 살다보면 어느 순간 호호 백발 편집자로 정년을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 정말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