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뀐 일곱달,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는 밤 …아이야, 그 뜨거운 햇살과 푸른 나무와 싱그러운 웃음을 기억하거라
▣ 김정미 여행전문가·지호, 지민 엄마 babingga@hotmail.com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사자 보러 가자고 꼬드겨 아이들을 들뜨게 해놓고서는 잠 못 이뤄가며 이것저것 짐을 싸서 서울을 떠나온 것처럼 이제 내일이면 아프리카를 떠나야 한다. 예정보다 한 달 길어진 일곱달이 됐다.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아루샤에서 더 익숙했던 서울로 한결 가벼워진 가방을 들고 돌아가야 한다.
짐을 싸다말고, 눈을 감는다
7달 동안 이곳 탄자니아 아루샤는 계절이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뀌었다. 뜨거운 햇살과 풍성한 비를 맞은 뒤뜰의 아보카도 나무는 우리에게 달고 싱싱한 열매를 제공했고, 이젠 넓은 잎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자랐다. 작은 잎새만 겨우 땅 위로 내밀었던 잔디는 집 앞 뜰을 가득 메울 기세다. 해가 뜨고 지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아프리카의 자연은 수만 년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곱달은 천천히 그리고 부지런히 걸어오면서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 서울에 돌아가면 아이들의 놀이터는 좁아질 것이다. 아프리카는 어디든 놀이터가 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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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올 때는 생활 정보가 미진해 아이들 옷부터 고추장, 된장 등 한국 음식에다 한 보따리의 의약품들, 그리고 냄비, 그릇까지 이것저것 넣었다 뺐다 하면서 가득 채워왔다. 심지어 전기 없는 아프리카를 걱정하며 랜턴의 배터리까지 잔뜩 가지고 왔는데, 이제는 텅 비어버린 이 가방에 무얼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까? 지인들에게 줄 자그마한 아프리카 공예품을 잘 포장해 차곡차곡 넣어봤지만, 이미 여러 가지 물건이 빠진 커다란 가방은 좀처럼 차지 않는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한국에 가져갈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텅 빈 가방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잠들어 있는 아이들 곁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바람에 출렁이며 따스한 숨을 쉬게 해주는 푸른 나무. 그리고 건기를 기다리며 땅속에 숨어 살다가 비가 오자마자 그 생명의 신비를 우리에게 일컬어주는 작고 이름 없는 풀들. 너무 파래서 만지면 손이 물들어버릴 것 같은 하늘, 하얀 색깔로 너무 많은 세상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구름을 머리에 그려본다. 별이 너무 많아서 가방에 넣으면 도저히 무거워 들고 갈 수 없는 아프리카의 밤하늘을 어떻게 가져갈 수 없을까. 한껏 숨을 들이켜본다.
두꺼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싱그러운 웃음도 가져갈 수 없고, 반으로 자르면 시지 않은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오렌지를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다른 도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닌 자연에서 불어오는 비릿한 풀냄새가 섞인 바람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에 살짝 구워진 듯한 뽀송뽀송한 흙을 가지고 갈 수도 없다.
가져갈 수만 있다면 가지고 가고픈 수없이 많고 영롱한 색깔을 가진 꽃들과 각양각색의 열매를 잉태하는 이름 모를 나무들, 지겹도록 집 밖으로 내쫓아야 했던 신기한 여러 종류의 곤충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하루 종일 우리 집을 가득 메우는 새들의 소란한 울음소리와 눈이 부셔서 잠을 설치게 하는 뜨거운 아침 햇살, 그리고 하얀색으로만 그려도 저리도 예쁜 모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구름과 마음까지 깨끗하게 만들어주던 풀냄새 나는 바람, 보기만 해도 시원한 킬리만자로의 작은 개울을 가방이 아닌 나의 머리와 마음에 담아본다.
어리석고 무모한 용기여
세상 어디에서나 해는 뜨고 지고 바람은 불고 나무와 풀들은 자라지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모래바람만 불어 쩍쩍 갈라지는 땅속에서 힘든 시간을 버텨내고 살아온 생명들이 우기가 오자마자 마치 제 세상 만난 듯 힘찬 기지개를 켠다.
목마른 건기를 버티며 다가올 우기를 기다리는 동물들의 처절한 눈빛, 목마름을 버티며 살아가는 태초의 상태 그대로인 식물들을 바로 우리 창문 너머에서, 아니 몇 시간만 운전하고 가면 만날 수 있는 곳에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꼬드겨 나만의 즐거움을 추구한, 무모한 나의 용기에 대한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 사바나의 초원으로 석양이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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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어미는 아이에게 무언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마지막에도 숨기지 못하나 보다. 잠들어 있는 지호, 지민이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한다, 고맙다. 용기밖에 없는 바보 엄마를 따라와서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지내줘서 말이야. 꿈에서라도 가끔 이 자연을 만나주길 바란다.”

△ 건기를 버티고 있는 가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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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파리에 가면 누떼를 언제나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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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호 학교 가는 길에 보이는 들판 풍경.
이 풍경을 모두 가져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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