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혜경/ 방송작가·세원, 윤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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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봐라! 저기 은빛 산.

얼마나 깊고 차가운 이상을 품었기에 적도에 우뚝 솟았으되 백설을 이고 섰는가!

우리가 사는 아루샤는 탄자니아의 작은 소도시지만, 탄자니아의 대표적인 국립공원인 킬리만자로와 세렝게티, 응고롱고로, 타랑기레에 가는 길목이다. 킬리만자로산은 아루샤에서 1시간쯤 가면 있는 모시라는 소도시에 있지만, 비 온 뒤 구름이 없는 날에는 아루샤에서도 눈 덮인 킬리만자로산 정상을 볼 수 있다. 킬리만자로산을 보기 위해 모시로 가는 길, 과연 그 높은 산이 언제 우리 앞에 나타날까 궁금했는데, 한순간 떡하니 나타났다. 여행 안내서에 적힌 대로 그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겠거니 했는데 방금 구름을 밀쳐낸 듯 흰 눈을 이고 선 킬리만자로는 정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황홀하게 했다. 과연 아프리카의 지붕이요, 탄자니아의 왕관이라고 할 만하다. 아이들은 더운 이곳에서 눈을 이고 선 킬리만자로를 보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다.

아이들은 10년 뒤에야 오를 수 있구나

아프리카에는 눈이 안 온다고 했는데 왜 저 산 꼭대기에는 눈이 있냐고 한다. 게다가 높은 산이라고 하는데 왜 산봉우리가 뾰족하지 않고 평평하냐고 묻는다. 날씨는 덥지만 산 정상은 높아서 춥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쌓여 있던 얼음이나 눈이 녹지 않고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또 킬리만자로는 화산 활동을 했던 산 중에서도 산 중심부가 가라앉는 칼데라 화산인 듯하다고 얘기해줬다. 킬리만자로엔 서쪽부터 시라봉, 중앙에 있고 가장 높은 봉우리인 키보봉, 마웬지봉이 있는데 실제로 키보봉의 중심부는 움푹하게 파여서 과거 화산활동의 흔적을 보여준다. 휴화산이라 완전히 활동을 멈춘 것은 아니라서 지금도 중심 부분은 때때로 뭔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리거나 가스가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도 눈을 이고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함께 간 현지인이 킬리만자로 정상을 볼 수 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해준다. 구름에 덮여 있는 경우가 많아, 덕을 많이 쌓은 사람만이 볼 수 있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당일에 와서 정상을 볼 수 있다니, 운이 좋다고 얘기한다. 우리 다음에 온 인도 사람은 왜 정상이 안 보이냐고 투덜댄다. 그러기에 덕 좀 쌓지…. 잠깐 사이에 다시 구름에 싸인 킬리만자로는 두 번 다시 그 자태를 보여주지 않았다. 현지인이 킬리만자로가 ‘샤이’(shy)한다고 답한다. 저, 웅장한 산이 부끄러워한다니, 참으로 묘한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아하니 마웬지봉은 꼭대기 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진 듯해 저기도 등반을 하냐고 물었더니, 예전에는 산악인들만 올라가는 것을 허락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서 이제는 정부에서 등반을 금지했다고 한다.

△ 아프리카의 지붕, 탄자니아의 왕관이라고 불리는 킬리만자로산. 좀처럼 정상을 보여주지 않는 부끄럼 많은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로이터연합)

아프리카대륙의 최고봉이자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산인 만큼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일단 몸도 만들어야 하고, 고산병에 걸리지 않도록 약 5일 정도 일정을 잡고 ‘플레플레’(천천히) 등반해야 한다. 올라가는 데 3일, 내려오는 데 2일을 잡아야 한단다. 아이러니하게도 등산 초보자가 가볍게 오르는가 하면 베테랑이 고산병으로 애를 먹기도 하고, 잘못하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래서 17살이 넘어야만 등반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이 17살이 되려면 최소한 10년은 기다려야 한다. 산 위의 눈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데…. 그때도 저 산 위에 은빛 눈이 남아 있을지, 등반을 다음 기회로 미루자니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킬리만자로는 탄자니아 땅이지만 케냐 땅이 될 뻔했다. 독일인 선교사가 발견하고 역시 독일인이 최초로 등정에 성공했는데, 당시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2세가 킬리만자로가 아프리카의 최고봉이란 사실을 안 뒤 영국과 협상해 영국령 동아프리카 식민지(지금의 케냐)에 포함돼 있던 산을 독일령 동아프리카, 지금의 탄자니아에 편입시켰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듯 케냐와 탄자니아의 국경선을 살펴보면 킬리만자로가 있는 부분에서 휘어져 있다. 탄자니아 사람들 역시 킬리만자로를 신성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 초대 대통령 줄리어스 K, 니에레레의 ‘킬리만자로 정상에 횃불을 걸자,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증오가 있는 곳에 존엄을 주기 위해’라는 연설이 동판으로 만들어져 키보 정상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물론, 여전히 정치인들의 연설에는 킬리만자로가 등장한다. 또 이곳 여자들이 높이 땋은 머리를 ‘킬리만자로 헤어’라고 부른다.

헤밍웨이와 ‘빛나는 언덕’

<킬리만자로의 눈>을 쓴 헤밍웨이 역시 킬리만자로를 사랑했던 것 같다. 자신의 사파리 경험담을 많은 소설로 풀어낸 헤밍웨이는 그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말미 부분에 비행기를 아루샤로 돌리지 않고 킬리만자로산을 향해 돌진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것만큼 멋진 엔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때의 헤밍웨이도 우리처럼 이 길을 달려 킬리만자로를 만나고 이 길을 걸어 산을 오르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을 손으로 만져보았을까? 킬리만자로에 오니 헤밍웨이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킬리만자로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로 ‘느가예 느가이’(신의 집)라고 불리고 있다. 이 서쪽 봉우리 가까이에는 말라 얼어버린 한 마리의 표범의 시체가 있다고 하는데 이처럼 높은 곳에서 표범은 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해주는 이 없다.”(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 서문)

과연 표범은 저 높은 곳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킬리만자로는 이곳 현지어로, ‘빛나는 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