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의 외국기업 한국인 CEO]
식이섬유와 자일리톨을 이 땅에 들여온 주역 다니스코코리아 조원장 대표
하산할 때의 ‘힘조절’을 통해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는 전략을 깨닫다
다니스코라는 회사 이름을 들어보지는 못했어도 이 회사가 국내에 처음 들여온 ‘식이섬유’와 ‘자일리톨’은 낯설지 않을 듯하다. 조원장(48) 다니스코코리아 대표는 다니스코의 한국 사업을 총책임지고 있을 뿐 아니라 식이섬유와 자일리톨을 이 땅에 들여온 주역이다.
대망의 종합상사, 부도의 시련
조 대표는 다니스코와 합친 화이자 식품사업부 한국지사가 1980년대 말 국내 첫 기능성 식품 소재인 식이섬유를 공급할 때 책임자였다. 나중에 다니스코와 합치게 되는 핀란드계 쿨토가 2000년부터 국내 제과업체 등에 자일리톨을 공급해 선풍을 일으킬 당시 쿨토 한국지사장 역시 그였다. 식이섬유와 자일리톨은 단순한 먹을거리를 넘어 건강을 챙기는 기능까지 추가한 기능성 식품 소재로, 국내 식품소재 산업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두 사례로 꼽힌다.
조 대표가 ‘식품’ 부문에서 일하고 있는 건 고등학교(서울고) 시절에 싹텄을 것이라 짐작된다. 생물을 가르친 선생님한테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대학(연세대)의 전공(생화학)으로 이어졌다고 하니. 생화학 전공은 식품 소재 업체인 화이자 식품사업부, 쿨토, 다니스코로 연결된 바탕이었다. “생물 과목은 별로 재미없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선생님은 정말 탁월했습니다. 얼마나 재밌게 가르쳤던지 생물 시간만 되면 한 명도 졸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 생물 교사는 한국교원대 총장(2000년 3월~2004년 2월)을 지낸 정완호(66)씨다. 조 대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가 1976년이니 당시 정 전 총장은 30대 중반의 새파란 나이였다.

△ 올여름 산악자전거를 타고 알프스 몽블랑을 일주한 조원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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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래서 생화학과를 가게 됐다는 건 아니고, 일종의 자기 ‘합리화’도 있죠. 의대는 피(수술)를 보고 싶지 않아 택하지 않았고, 화학 쪽은 성격에 맞지 않았습니다. 생물학과 관련된 쪽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점수도 봐야 했고.” 필연적인 수순에 따라 학과를 선택했다기보다는 현실적인 여건 등이 감안돼 선택된 학과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다는 솔직한 실토가 정겹게 들렸다. 대학입시 점수에 따라 지원 가능한 대학과 학과가 거의 숨막히는 배치표에서 그 또한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12·12 쿠데타(1979년), 이듬해 5월 광주항쟁 등 격동의 현대사가 굽이치던 험악한 시절 군대에 복무한 그는 대학 졸업반이 되어 종합상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과를 택하긴 했어도 실험실에서 가운 입고 하는 게 싫더군요. 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거죠.” 그가 졸업할 즈음에 율산, 제세, 대우그룹이 한창 뻗어나갔다. ‘에스키모한테 냉장고를 팔고, 아프리카에 가서 신발을 판다’는 신화가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던 시절로, 종합상사는 최고 직장으로 꼽혔다.
종합상사 입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다른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기도 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국제상사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전공 때문이었는지 부서는 화학수출부. 어렵게 들어간 회사인 만큼 그럭저럭 만족스러웠을 법한데, 그는 여기서 뜻밖의 암초를 만나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된다. 입사 2~3년 뒤인 1984~85년 국제상사가 금융권의 여신 회수로 자금난을 겪다가 부도를 냈고, 그는 결국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때 이런저런 소문이 많이 돌았죠. 양정모 회장(국제그룹)이 대통령(전두환) 주재 10대 그룹 총수 모임에 늦게 참석하는 바람에 청와대 눈 밖에 났다는 둥…. 양 회장은 순진하고 쟁이 정신을 갖고 있는 양반이라는 평이 많았습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맵고 쓴 상황에서도 적절히 대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었고.”
배낭여행 1세대의 경험이 밑거름
국제상사가 사실상 첫 직장인 셈인데,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땐 당혹스러웠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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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원장 대표는 "자전거 타기나 기업경영에서나 용기와 힘조절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진/ 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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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지 않았나요?
“일반 회사 영업사원을 하며 맨발로 뛴 경험이 있었고, 아직 젊었으니 뭘 못하랴 싶었죠. 무전여행이나 다름없는 해외 배낭여행을 해본 것도 자신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고.”
그가 3개월에 걸친 배낭여행을 떠난 건 1982년. 국제상사에 자리를 잡기 전의 공백기였다. 단기 해외유학이 막 풀린 이듬해였으니 ‘배낭여행족 1세대’라 자칭하는 게 무리는 아닌 셈이다. 여행사 중역으로 있던 친구 매형의 배려로 여권을 받아내고, 항공권과 500달러를 들고 친구 한 명과 대만, 홍콩, 마카오, 타이, 싱가포르, 필리핀, 일본을 돌았다. 떠나는 비행기에서 ‘coffee or tea’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영어 실력으로 동남아 지역을 돌며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생존 영어’를 익혔다. 이는 나중에 종합상사와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밑거름이었다.
그가 외국계 기업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건 1988년. 국제상사를 떠나 동양제철화학 계열에서 일하던 중 곤경에 빠진 아버지의 사업체를 정리하는 작업에 뛰어드는 바람에 또다시 ‘백수’ 시절을 겪은 뒤였다. 영어신문에 난 외국계 회사의 채용공고를 보고 이곳저곳에 원서를 보냈더니 미국계 화이자에서 제일 먼저 답신을 보내왔다. 당시 화이자는 식품사업 부문 한국지사를 막 설립하려던 때였다.
옛 회사의 선배들도 참여한 경쟁 대열에 낀 그는 현장 경험과 전공, 열정을 인정받아 책임자로 발탁돼 ‘식이섬유’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화이자에 가세한 그는 식품업계, 영양학회와 접촉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습관 자료를 조사하는 등 ‘시장환경 조성’을 통해 식이섬유의 섭취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1990년대 들어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식이섬유 음료의 인기가 치솟은 건 여기에서 비롯된 바 컸다. 이후 식이섬유는 제6의 영양소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도 대표적인 기능성 식품 소재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 따른 최대 수혜자는 물론 수용성 식이섬유를 개발해 공급하는 쿨토였다.
핀란드 쿨토가 화이자 식품사업부를 인수합병한 뒤 쿨토 한국지사장으로 말을 갈아탄 그가 자일리톨 신화를 일궈내기까지는 난산을 겪어야 했다. 국내에 자일리톨 제품(롯데제과 껌)이 첫선을 보인 건 그가 쿨토 지사장에 오른 이듬해인 1997년. 롯데제과는 1990년대 초반에 나온 해태제과의 무설탕 껌 ‘덴티큐’로 맹추격을 당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껌 시장 점유율에서 70 대 30 정도로 해태를 멀찍이 앞서다 55 대 45로 좁혀질 정도여서 롯데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일리톨 껌은 무설탕 껌에서 한발 더 나아가 치아에 좋은 껌이란 기능성을 덧붙인 것으로, 롯데제과에서 1997년에 첫선을 보였다. 핀란드산 자작나무에서 추출한 소재의 공급자는 물론 쿨토 한국지사였다. 조 대표가 쿨토 지사장에 취임한 지 1년 만이었는데, 롯데의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자일리톨이 뭔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터에 일반 껌보다 훨씬 비싼 자일리톨 껌이 잘 팔릴 리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자일리톨 껌을 선보인 일본롯데는 대성공을 거둬 이곳에 소재(자일리톨)를 공급한 쿨토 일본지사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쿨토 일본지사에서 취급하는 20~30개 품목 가운데 자일리톨의 비중이 제일 컸다고 한다.

△ 다니스코가 개발, 공급하는 자일리톨을 첨가해 만든 제품들. (사진/ 다나스코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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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일리톨 알리는 일에 혼신을 다하다
“자일리톨이 뭔지 알리는 일이 가장 우선이었습니다. 소비자들에게 필요한(충치 예방에) 것이란 인식을 심어주는 이른바 시장환경 조성이었죠.” 그가 먼저 브랜드 연상이 쉽도록 자일리톨 앞에 ‘핀란드’라는 말을 붙이고 ‘자작나무 설탕’이란 표현을 씀으로써 입소문을 노렸다. 식품효능 광고를 못하는 법규를 피해가기 위해 ‘설탕과 충치가 이혼했다’는 절묘한 문구로 식품 전문지에 광고를 실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브랜드 인지도 높이기에 이어 치과의사들을 통해 신뢰성 있는 입소문을 만드는 작전이 펼쳐졌다. 쿨토 한국지사는 롯데제과에서 주문제작 방식으로 자체 자일리톨 껌을 만들어 치과의사들에게 돌렸다. 치과의사들의 입을 통해 충치 예방 효과가 있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차츰 시장 환경이 조성됐다. 2000년 2월부터는 롯데제과 상표를 단 본격적인 자일리톨 껌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에 힘입어 다니스코와 쿨토가 합병해 새롭게 탄생한 다니스코 한국 법인에서도 여전히 대표를 맡게 됐다. 조 대표는 “(자일리톨의 시장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뛰어다닌) 1998년 1월부터 2000년 1월이 인생 최대의 고비였고, 어려운 시기였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요즘 산악자전거 타기에 푹 빠져 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초 한 언론매체에 실린 ‘철인 3종 경기’ 특집 기사에 끌려 시작했다가 이제 수천m를 오르내리는 200km 코스의 알프스 몽블랑을 일주하는 이력까지 쌓았다. “태백산에서 2박3일 동안 280km를 일주할 때는 갈비뼈가 부러진 적도 있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건 소백산에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암벽투성이 산을 내려올 땐 밸런스(균형)가 필수적이죠. 용기도 필요하지만, 힘 조절을 잘해야 다치지 않거든요. 기업 경영도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돌투성이 산을 한번 타고 내려오니, 어려운 시절을 겪어낼 수 있겠다는 전략이랄까, 그런 게 생기는 듯하더군요.”
*‘외국기업 한국인 CEO’는 이번호(15회째)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