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의 외국기업 한국인 CEO]
종합상사에서 겪은 시련을 자산으로 만든 밀레코리아 안규문 사장
전쟁이든 금융위기든 위기 상황에서 탄력적으로 대응해 활로 뚫어야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바빠도 커피는 한 잔 먹고 합시다. 제가 커피는 비교적 잘 끓입니다.”
사장실 한 귀퉁이의 커피메이커에 다가선 안규문(54) 사장의 손놀림이 익숙해 보였다. 배석한 여직원을 마지막으로 원두커피를 차례로 한 잔씩 돌린 뒤 자리에 앉은 안 사장은 “이런 거(차 심부름) 시키면 여직원들은 일을 못한다”고 말했다. 안 사장의 밀레코리아는 비서직을 두지 않고, 운전기사도 따로 없다. “(사장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도 아니고, 일종의 낭비라고 생각해서….” 안 사장은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역삼동 사무실까지는 주로 전철을 타고 다닌다. 운전기사가 필요할 땐 대리운전 서비스를 이용한다.
쿠웨이트 지사장의 영예가 재앙으로
미리 훑어본 이력은 좀 보수적인 이미지를 주던데…. (안 사장은 (주)쌍용 출신이며, 밀레코리아의 모기업인 독일계 밀레는 4대째 경영권을 세습하고 있는 가족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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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음도 거의 없고 20년 동안 끄덕없습니다." 안규문 사장이 서울 역삼동 밀레코리아 1층 매장에서 드럼세탁기의 성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곽윤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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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상사에서 주로 일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네요. 같은 쌍용 계열이라도 (주)쌍용과 쌍용양회는 또 다릅니다.” 해외 영업을 주로 하는 종합상사 (주)쌍용이 좀 유연하다는 뜻이리라.
안 사장이 (주)쌍용에 입사한 때는 1976년 10월. 삼성물산에 이어 (주)쌍용이 2호로 종합상사로 지정된 직후였다. 박정희 정권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종합상사의 인기가 치솟았던 시절, 쌍용그룹은 재계 순위 2~3위를 다툴 정도로 탄탄대로였다. 종합상사 두 곳에 모두 합격한 안 사장의 ‘쌍용행’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입사 초기엔 ‘카피 보이’였죠, 뭐. 제록스가 나오기 전이어서 복사를 하고 나면 손에 잉크가 시커멓게 묻어났습니다.” 지금과는 기업 문화도 많이 달라 복사기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도 선배 직원이 오면 황급히 비켜줘야 했다고. 안 사장은 그래도 그 시절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조직 생활과 인내심을 배웠고, 도제식 교육에 따른 장점도 많았기 때문”이란다. 현대건설보다 30~40%가량 많은 급여를 받았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입사 5년 만에 쿠웨이트 지사장으로 발령받은 그에게 세상은 온통 장밋빛이었다. 수출유공 사원으로 표창을 받는 등 능력을 인정받은 데 힘입어 30대 초반의 새파란 나이에 종합상사의 꽃이라는 해외지사장 자리를 꿰찼으니…. 안 사장은 “(두 팔을 벌려 보이며) 그땐 세상이 요만해 보였다”며 웃었다. 그렇지만 뜻밖에도 쿠웨이트 지사장 자리는 그에게 재앙이었다.
하필 발령이 나던 해 제1차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진 것이다. 쿠웨이트 지사는 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중동 수출의 전초기지여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곧 종합상사 쌍용의 수출 중단을 뜻했다. 자리에서 잠깐 일어난 안 사장은 사장석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세계지도 앞으로 다가가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국경선을 짚어가며 “여기가 막히니 시멘트, 철강, 건설자재 할 것 없이 수출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시멘트 수출? 미쳤구나!
“때마침 아내가 둘째를 가져 배가 남산만 할 때였지요. 얼마나 고민을 했던지 ‘신경성 원형 탈모증’이 생길 정도였다니까요. 세상과 인간의 고뇌에 대해 좀 배웠지요, 허허. 혼자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여건과 상황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전쟁 발발 1년 뒤 본사에 사업 철수를 건의한 그는 한참이나 핀잔을 들어야 했다. ‘힘내서 잘해보라고 보내놓았더니 1년 만에 철수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전쟁이 곧 끝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힐책도 있었다. 그는 그래도 “전쟁이 오래 갈 것 같다”며 거듭 사업 철수를 건의해 관철하기에 이르렀다. 두 달 뒤 삼성, 금호, 효성, 국제상사 등 다른 기업들도 잇따라 쿠웨이트에서 퇴각했다. 선두권 쌍용의 움직임이 국내 다른 기업들의 풍향계였던 것이다.
전쟁은 3~4년을 더 끌어 사업 철수는 결과적으로 잘한 결정이었는데, 문제는 그의 자리였다. “해외지사장으로 나가면 보통 4년가량 있다 들어오는 관례에 따라 자리가 다 세팅돼(정해져) 빈자리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달랑 책상 하나뿐이고 할 일이 없었습니다.” 얼마 뒤 회사는 남녀 직원 1명씩을 배정해주며 뭐든 해보라는 ‘황당한’ 제안을 했다.
후배 직원 2명과 함께 일종의 프로젝트팀을 꾸린 그는 “일본에 시멘트를 수출하는 일을 해보겠다”는 사업 계획을 제시했다. 회사 쪽의 반응은 거의 ‘미쳤다’는 식이었다. 당시 일본은 시멘트 수출 1위국이었다. 우리나라의 연간 수출액이 300만t일 때 일본은 1천만t에 이를 정도였으니 일본으로 시멘트를 수출한다는 걸 납득하기 어려웠음직하다.
“나름대로 조사한 뒤에 사업 계획을 낸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소비자가격이 t당 100달러로, 우리나라의 30달러보다 훨씬 높았거든요. 동해에서 국제선을 활용해 일본으로 실어나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습니다.” 회사의 승인 뒤에도 일본 시멘트 업계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다 재일동포 계열 레미콘 업체들의 도움으로 결국 수출 길을 열게 된다. 일본에 시멘트를 수출한 첫 기록은 이렇게 세워졌다. 시멘트건재부에서 일본 수출을 전담하는 사업4과를 새로 둔 게 이즈음이었다. 사업4과의 책임자는 물론 그였다. (주)쌍용 시멘트건재부는 일본 수출 길을 뚫은 데 이어 1985년부터 일본 현지에 시멘트 저장탱크를 둬 현지 수요에 즉각 대응할 체제를 갖추었다.
일본 수출 길을 연 그는 (주)쌍용 미국 현지법인 쌍용USA에 파견됐다. 현지에 시멘트 저장탱크를 만들 계획이었던 미국 현지법인에 그의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럭저럭 순탄했던 그의 항로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건 1997년 1월, 방콕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때였다. 미수채권 해결사라는 임무가 만만치 않았던데다 동남아권에 이미 금융위기의 먹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동남아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타이 아니었습니까. 은행 돈 꾸어 건물 올리고, 호텔 짓고 하다가 거품이 터졌던 거지요. 그러니 쌍용 같은 국내 종합상사의 타이 사업은 전면 중단될 수밖에요.”

△ 사장실 벽의 세계지도를 짚어가며 (주)쌍용 쿠웨이트 지사장 시절의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 안규문 사장. (사진/ 곽윤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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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지사장, 금융위기의 폭풍 맞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를 중심으로 한 방콕지사는 타이에서 중동으로 수출하는 ‘3국간 수출’로 활로를 모색하기에 이른다. 중동에 구축해둔 네트워크를 활용해 타이의 천연 석고를 수출한 게 한 예. 타이 석고를 중동에 보낸 3국간 수출로 쌍용 방콕지사는 타이 정부로부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지원 약속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주)쌍용이 국내 종합상사로는 처음으로 3국간 수출 방식으로 타이의 시멘트를 중동에 수출하기로 계약을 맺었다는 뉴스가 국내 언론을 탄 게 이즈음이다. “회사는 아메바처럼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걸 배웠죠. 수출이 어려워지면 수입으로 돌아서고, 또 3국간 수출로 활로를 뚫으면서 이익을 창출하는 식으로….”
별명이 ‘메이드 인 쿠웨이트’인 둘째아이의 학업 문제 때문에 2000년 쌍용을 떠난 그는 3년 만에 다시 쌍용의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쌍용의 우회 출자로 설립된 ‘코미상사’ 대표를 맡은 것. 코미상사는 독일 밀레의 고급 가전제품의 수입 통로로, 밀레코리아의 전신이다. 외환위기 뒤 쌍용을 접수해 관리해온 채권단은 올 들어 코미상사의 지분을 독일 밀레에 모두 넘겼으며, 코미상사는 올 8월부터 독일계 밀레코리아로 거듭났다. 안 사장으로선 쌍용 계열 사장에서 돌연 독일계 기업 대표로 옷을 바꿔입은 셈이다. 안 사장은 “코미상사 대표 시절 수입처인 밀레 본사로 가서 한국 시장 전망 등에 대해 몇 차례 설명회를 열었는데, 그게 밀레의 입사 면접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밀레코리아의 드럼세탁기, 오븐, 청소기 따위가 전시된 1층 매장으로 안내해 제품을 설명하는 안 사장은 영락없는 세일즈맨이었다. 언제든지 사장직에서 영업직으로 옮겨 일할 태세를 갖춘 아메바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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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를 발명한 그 기업 ‘메이드 인 독일’ 원칙 고수하는 밀레, 국내 수입가전 시장에서 15% 차지
밀레코리아의 모체인 독일계 밀레는 세계 산업사에 남을 기록을 몇 개 지닌 전통의 기업이다. 세탁기를 발명하고, 전기로 움직이는 가정용 식기세척기를 처음 생산한 업체가 바로 밀레다.
이 회사는 1899년 카를 밀레와 라인하르트 진칸이 세운 크림분리기 공장 ’밀레 & 씨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른 살에 사업을 시작한 두 창업자는 공장 설립 4주 만에 수동 크림분리기를 생산하고, 뒤이어 버터 휘젓는 장치, 참나무통과 나무 바퀴를 장착한 세탁기를 만들어냈다. 1904년엔 구동 벨트와 변속기에 의해 전기식으로 작동되는 세탁기를 처음으로 만들어 농가를 중심으로 보급에 나섰다.
밀레는 한때 자동차 생산에 나서기도 했다. 1910년대에 생산된 당시 자동차는 독일의 밀레 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지금도 작동할 수 있다고 한다. 밀레는 1929년 전기 식기세척기를 개발한 데 이어 1930년대 들어 금속 재질의 세탁기를 내놓았으며, 1956년엔 완전 자동 세탁기를 처음으로 생산해내는 등 세계 가전 사업을 주도했다. 품질 유지를 위해 ‘메이드 인 독일’ 원칙을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쌍용 기계수입부, 코미상사를 통해 한국 시장에 진출했고 올해 코미상사 지분을 인수해 한국 현지법인 밀레코리아를 설립했다. 밀레코리아에서 판매하는 가전제품으로는 세탁기, 의류건조기, 식기세척기, 냉장고, 오븐(전기·스팀), 커피메이커 등이 있다. 600만원대의 오븐에, 세탁기 값은 비싼 게 400만원을 웃돌 정도로 고급품 위주다. 2조원 규모의 국내 가전제품 시장에서 수입품 시장은 1천억원 정도이며, 밀레코리아는 이 가운데 15% 안팎(150억~200억원)을 차지하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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