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송년 공연을 준비하는 산울림의 연습 현장 취재를 갔다. 대중음악 담당도 아닌 내가 기꺼이 남의 ‘나와바리’를 침범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나이 차 많은 언니들 덕에 <아니 벌써>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같은 노래를 꼬마 적에 듣고 자라면서 산울림이 ‘내 인생의 첫 밴드’(라기보다는 가수?)로 각인됐고, 두 번째는 ‘말로만 듣던’ 김창완을 만나고 싶다는 호기심이 평소 일에 대한 나의 게으름을 훌쩍 뛰어넘었다. 천재 작곡가(라는 건 사실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자타가 공인한 주당,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흐르는 따뜻한 말투 가운데 툭툭 튀어나오는 어떤 통찰. 한마디로 재미있는 아저씨일 것 같았다는 말이다.

‘12:00~19:00’,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던 연습실 임대 시간이 한참 남은 오후 4시께 연습이 끝났다. “뭐 마실래요?” 허걱. “혹시 저 때문에 연습을 빨리 끝내신 건가요?” “그럴 리가. 맥주 괜찮아요?” ‘그분’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고 다음 취재 일정도 있었지만, 대수인가. 김창완 아저씨(친근한 표현이 아니다. 매니저를 비롯해 팬들이 그와 형제들을 부르는 공식 호칭이 ‘아저씨’라는 걸 그때 알았다)와 형제들을 따라 종로의 맥줏집에 갔다. 언젠가 그가 ‘스타의 맛집’ 같은 데서 소개한 적이 있었던, 수제 맥주를 파는 곳이었다.

혼자 있기 뻘줌해서 친구를 한 명 불렀고 술자리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그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시시콜콜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술자리는 근래 내가 겪었던 술자리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들이 오가거나 좋은 술을 마셔서가 아니다.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오갔고, 그냥 편했다. 유난히 ‘나이 가림’이 심한 나에게 쉰 줄의 ‘어른’과, 하물며 처음 만난 사람과의 자리는 도무지 편할 수가 없는데 마치 며칠 전에도 만났던 친구와 “날도 추운데 술이나 한잔하자”고 만들어진 그런 술자리 같은 분위기였다. 거창한 음악론도 없었고, 어른이 아이에게 해주는 어떤 교훈적 대화도 없었으며, 더구나 “쭈욱 원샷” 같은 강요도 없었다. 그 술자리가 좋았던 건 무언가 특별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없는 게 많아서였다.

그는 사학법 논쟁에 대해 의견을 묻기도 했고, 70~80이라는 타이틀로 화석화된 음악을 소비하는 요사이의 흐름에 대해 짧은 탄식을 하기도 했다. “요새 너무 우울하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그는 자신의 경험과 함께 “우울함은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운명 같은 거 같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울함에 제일 좋은 처방이 뭔지 아우?”(그의 말투는 ‘하우’체다) 하고 물었다. 그러곤 “친구”라고 자답했다. 평범한 말이지만 마음에 와 닿았다. 그건 내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절실해지는 것이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김창완 아저씨가 멋지게 나이든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다음날 산울림 팬카페 10주년 모임에 가서 그를 잠깐 다시 만났고, 그날의 ‘주인공’들에게만 주어진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와서 “한입 먹어봐요”라며 콩 한 알도 쪼개는, 아니 술 한 방울도 나누는 진정한 술친구의 면모를 보여줬다. 다른 일 때문에 먼저 일어서는 친구와 나에게 “오늘 신곡 연주할 건데, 못 듣고 가? 섭섭하네. 그럼 조심해서 잘 가우.” 잡지 않고 선한 손인사를 했다. 딱 한 번 함께 술을 마셨지만 우리는 친한 술친구가 된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본 가장 근사한 주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