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갈등의 시간이다. 구내식당이 잘 갖춰진 회사에 다니더라도 ‘외식’의 유혹은 필연이다. 오전 11시30분이 넘어가면서,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존재론적 고민에 사로잡힌다. ‘오늘은 어디서 뭘 먹나, 그것이 문제로다!’

열린우리당을 ‘출입처’로 삼은 지 50일이 채 안 된, 이른바 ‘여당 말진’인 나도 이런 고민에서 예외일 수 없다. 다만 고민의 초점만 다를 뿐이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다. 어디서 뭘 ‘먹느냐’보다는 누굴 만나 무슨 얘기를 ‘듣느냐’가 중요하다. 뉴스의 중심에 서 있는 정치인과 점심을 먹는 날이면, 신경이 온통 취재원의 입에 쏠리니 밥맛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뉴스>에서 일하는 한 동업자는 “약속이 취소돼 혼자 국회 구내식당에서 밥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의한다.

지금 여의도는 때아닌 선거의 계절을 맞고 있다. 한나라당이 새 원내대표를 뽑았고, 열린우리당은 이미 원내대표 선거를 마치고 2월18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민주노동당도 당직 선거를 마쳤고, 당 대표 결선투표를 앞두고 있다. 요즘 밥 많이 먹고 있다.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는 9명의 정치인이 당 의장 후보로 나섰다. 이들 모두 출마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당 출입기자들과 밥을 먹었다. 주요 후보자들은 선거사무실 개소식이나 정책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나선 뒤, 역시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2월2일 끝난 예비경선에서 한 명의 후보가 탈락했으니, 이제 본선에 진출한 8명이 다시 밥을 사기 시작할 것이다.

“당사가 여의도에 있었던 시절에는 그나마 나았다. 메뉴 선택의 폭이 다양했으니까.” 90년대 말부터 정치권에서 일하고 있다는 한 당직자의 푸념이다. 재래시장이 밀집해 있는 영등포 당사로 이사를 한 뒤 주변에서 마땅한 밥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공보업무를 맡고 있는 당직자들은 점심시간이 더욱 고역이다. 기자단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특성 때문에 ‘단체석 완비’형 밥집만 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영등포 당사 주변에서 수십 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밥집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주로 가는 곳은 세 곳이다. 간접광고(혹은 영업방해)를 피하기 위해 이들을 각각 ㄱ·ㄴ·ㄷ밥집이라고 부르자. 지난 1월 말 기자회견을 마친 후보자를 따라 ㄱ밥집을 사나흘 연거푸 가게 됐다. 특히 맛있는 밥집도 매일 가면 그저 그렇게 느껴지는 게 입맛이다. ㄱ밥집 밥…, 맛없다. ㄴ·ㄷ밥집도 특별날 것은 없지만, ㄱ밥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경쟁력을 가진다. 고역이었다.

밥을 사는 정치인이 누구냐에 따라 밥집에 따라가는 사람들의 수에도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어떤 후보는 의원들만도 수십 명이 모여들기도 하고, 다른 후보는 단출하게 보좌관들만 자리를 함께하는 경우도 있다. 영남 출신의 한 후보가 밥을 살 때는 ㄱ밥집에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취재진과 당직자, 동료 의원들은 물론 지지자들까지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그날 이 후보자,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며 밥값 거뒀다.

당 의장 선거에서 앞서나가는 정치인들이 밥을 살 때면 자리 잡고 앉기조차 수월찮다. 밥집에 따라오는 취재진의 규모를 보면, 그 정치인의 ‘세’를 알 수 있다. 우연찮게 유력 후보자와 같은 날 밥을 사겠노라고 나선 비유력 후보자는 잘 차려놓은 밥상 일부를 물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정치권 밥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