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순간적이지만 내 주변이 가라앉고 심신이 침착해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일상의 속도는 빠르고 명상적인 생활은 점점 불가능해진다. 아무리 ‘나’라는 주체를 부여잡고 ‘나만큼은 천천히’ 다짐해봐도 사회적 환경의 이런저런 변수들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 인간이 아니던가.

문득 파울 클레의 그림이 생각난다. 좋아하는 화가와 그림이야 여럿 있지만, 예전 어느 모임에서 좋아하는 화가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을 때, 처음에 골랐던 화가는 둔중하면서도 깊이 있는 변혁을 추구한 세잔이었고, 그 다음으로 택한 이는 명상적인 그림을 그린 파울 클레였다.

짧은 경험을 빌려 말하자면, 그림은 직관적 감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는 작품은 후한 점수를 얻기 어렵다. (내 이해력을 의심하며) ‘긴가민가’ 보게 되는 작품은 역시나 (그 작가가) ‘긴가민가’하게 만든 작품이다. 관객은 오만하기보단 수줍다. ‘직관적으로’ 예술적 감동이 느껴져야만 우린 ‘가슴에 무언가 들어와 앉아버렸어’라는 유치한 고백을 사심 없이 할 수 있다. 그리고 난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고 고백을 했다. 모호하고 불투명한 선과 색깔들이 주는 고요함과 사색이 그저 좋았다. 그림들은 기승전결과 클라이맥스를 가질 필요가 없는 조용조용한 음악들이 지닌 편안한 위로와 비슷한 종류의 휴식을 줬다.

이렇게 애써 느린 속도의 무언가를 향유하지 않는 한 평범한 24시간들은 대체적으로 가속도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단기간의 학습으로 영어 점수를 올려야 하고,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부리나케 종로로 향해야 한다. 마감이 오는 무언가는 그 전에 처리해줘야 한다. 달력을 한 장씩 뜯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상실감에 문득 회한을 느낀다.

덕분에 몸 안 에너지들의 속도는 꽤나 헝클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한편에선 감속을 하자고 하고, 다른 한편에선 가속을 채찍질한다. 공부, 직장, 결혼, 인간관계, 다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에 다니고 하는 건가? 갑자기 절간의 나무 기둥을 한 아름 안고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이 애잔한 낭만성은 휴가계를 내고 마감날 사무실을 비워버릴까 염려하는 상사의 근심걱정으로 변이된다. 사무실의 액셀러레이터는 상사들이 밟기 마련이지.) 도심지 한복판의 극장에서 영화 <봄날은 간다>를 봤던 몇 년 전 어느 날, 스크린에 비친 절의 난간이 어찌나 그립게 다가오던지. 그 그리움은 지금도 진행 중이고 나와 명상은 여전히 사이가 소원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