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휴대전화라는 게 껍데기만 제조사에서 만들었지, 내부는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남의 기술들로 채워져 있더라는 비판이 있다. 그런데 한편에선 여러 기술을 한데 모아 순발력 있게 상품화해낸 기업의 응용력을 칭찬한다. 시장의 내일과 회계 장부를 알지 못하는 내가 쉽게 한쪽 편을 들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문화계의 원천 기술 부재에 대한 내 태도도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출판 담당 기자를 도와 책 봉투를 뜯으며 <알렉산더-세계제국의 꿈>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알렉산더>(을유문화사) <알렉산더>(루비박스) <알렉산더>(해냄)를 보곤 외화 <알렉산더>의 개봉이 머지않았음을 실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출판사의 즉흥적인 마케팅을 나무랄 권리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쏟아지는 외국 라이선스 뮤지컬에 누군가가 국내 창작물의 고갈을 걱정하는 동안, 업자는 “까다로운 원작자를 설득해내" “수십억원 매출을 달성한 문화기업CEO"라고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내 이기적인 소비 유전자는 그런 문제에 관심을 끄고 어떤 휴대전화와 뮤지컬이 좋은지 알아보라고 명령한다.

방학과 휴가가 있는 여름이 왔다. 밀레, 피카소, 백남준, 대영박물관…. 대목을 겨냥한 블록버스터 전시회들이 대기 중이다. 샤갈, 달리, 로댕, 렘브란트는 벌써 다녀갔다. 대가의 이름에 쉽게 혹하는 단발적 감수성에 멋쩍어하며 나는 대형 전시회에 간다. 그리고, 거장이 왜 거장인지 확인한다. 작은 갤러리를 동네 커피숍 삼아보려고 주제넘게 노력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쉽지는 않다. 재벌가 여인네들의 미술관 경영은 역사가 반복해온 일로 여기고 호암, 성곡 등 아호들의 미술관을 맘편히 다닐만큼 사립 미술관에 맹목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건만, 잘 안된다. 전시장 입구의 난초와 부실한 공립 교육 탓으로 쉽게 돌리고 만다.

얼마 전에는 9천원짜리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전시회에 다녀왔다. 지난해 모든 일간지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유명한 사진가다. 시장처럼 어수선한 전시장 분위기는 일종의 안도감을 줬지만, 정작 찬찬히 구경하려니 사람들 뒤통수와 말소리가 성가셨다. 결국, 지난해 서울 청담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렸던 브레송의 작은 사진전이 더 괜찮았다는 모순된 결론에 쉽게 도달한다. 문 밖에선 두렵고, 문 안에선 이보다 더 명상적일 수 없는 작은 갤러리들은 비극적인 존재이다.

아무튼 나를 포함한 수많은 관람객들이 9천원을 주고 다녀가는 이 행태를 비웃는 이는 없길 바란다. 타인의 취미와 취향을 함부로 재단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문화비 지출은 개인의 효용가치에 근거한다. 일본 배우와 프랑스 문학가를 담아낸 흑백 사진들을 보고 내가 직관적으로 얻은 문화적 감흥이 평생에 걸쳐 어떻게 발현할지 아무도 모른다. 문화는 사생활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