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우종영 칼럼 목록 > 내용   2005년04월13일 제555호
백운산 옷자락에 매화 꽃물 들 때

봄기운 진동하는 동곡계곡의 아름다운 나무들…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겨울눈들에 설레다

▣ 사진 · 글 우종영/ 야생화 사진 작가 · 나무 전문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는 광양의 백운산은 높이 1218m로 전라남도에서 노고단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덕유산 아래 영취산에서 갈라진 금남, 호남정맥이 ㄷ자 모양으로 휘어져 호남정맥과 백두대간 사이의 물줄기는 모두 섬진강으로 모여든다. 지도를 놓고 보면 지리산의 바로 아래 놓여 있기에 지리연봉에 딸린 산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막상 가보면 은빛 강물이 두 산을 가르며 넘실대는 것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집집마다 고개 내민 매화와 산수유

전라도 땅을 두루 아우르고 달려온 호남정맥은 마지막으로 솟구쳐올린 백운산으로 하여금 굽이굽이 150리 길을 이어온 섬진강의 마지막 물길을 인도하기에 더욱 빛나는 산이다. 상봉을 중심으로 도솔봉, 또아리봉, 매봉, 억불봉을 이어주는 4개의 지맥을 거느린 백운산은 바닷가의 산답지 않게 1천m가 넘는 큰 산으로 한라산 다음으로 다양한 식물종이 살고 있는 식물의 보고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유난히도 길어서인가 예년보다 열흘 정도 늦게 꽃들이 피어 상춘객의 가슴에 찬바람만 안겨준 3월 말 필자에게는 이상저온이 더없이 좋은 기회를 안겨다주었다. 축제가 끝난 뒤에서야 꽃들이 피어 호젓하게 봄을 즐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백운산의 산행은 성불계곡, 동곡계곡, 어치계곡, 금천계곡 등 4개의 계곡을 오를 수 있다. 그 중 광양만을 껴안을 듯 두 팔을 벌린 옥룡면의 동곡계곡이 제일 좋다. 가을의 억새와 봄의 철쭉 그리고 동백림이 어서 오라는 듯 손짓하는 곳이다. 광양IC를 빠져나와 옥룡면 가는 길가에는 집집마다 담 밖으로 삐죽이 고개 내민 매화와 산수유가 정겹게 맞이한다.


△ 섬진강을 바라볼 수 있는 다압면의 청매실 농원. 매화꽃이 화들작 피었다.

동곡계곡은 길을 따라 오르며 동곡마을, 선동마을, 묵방, 진틀, 논실의 버스 정류소가 있으며 이곳 모두 산행의 들머리가 된다. 이번 산행은 주변에 볼거리가 많아서 짧은 산행코스를 택했다.

백운산을 오르는데 가장 짧은 코스는 병암계곡이다. 들머리인 진틀에서 간단한 행동식과 물을 구입하고 다리를 건너면 병암마을 입구 시멘트 포장도로다. 정면으로 삼각형의 뾰족한 상봉과 그 왼쪽에 네모진 봉우리 신선대가 눈에 들어온다. 계곡에는 커다란 가래나무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산 아래에는 울긋불긋 진달래와 히어리가 피었건만 이곳은 해발 500m에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겨울눈들이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기만 하였을 뿐이다.

길은 시멘트길로 이어지고 500여m 가면 신선대로 바로 오르는 계곡길과 갈라진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집 한채가 덩그마니 있다. 고로쇠 약수철이 끝나서일까 썰렁한 침상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울타리를 끼고 오르는 길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로이 둔덕을 지키고 있다. 여름철 더울 때는 정자수 구실도 할 만큼 가지를 넉넉하게 뻗은 모습이 남도의 인심을 닮은 듯하다. 울타리 안에는 곳곳에 고로쇠나무가 식재돼 있다. 산속 깊숙한 곳에서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느니 나무를 심고 가꾸어 이용하려는 바람직한 모습이다.

소나무를 지나 오르는 길 오른편 바위틈에는 자귀나무, 나도밤나무, 비목이 농부의 손에 잘려나가고 남겨진 그루터기에서 자란 맹아가 또다시 튼실한 겨울눈을 내어 봄볕에 반짝인다. 계곡으로 들어서면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고 갓 잠에서 깨어난 다람쥐들이 새로운 먹이를 찾아 분주하다. 건너편에는 잣나무가 역광을 받아 검게 빛나고 생강나무 둥그런 꽃눈이 노릇노릇 터질 듯 말 듯 나그네의 춘심(春心)을 자극한다.


△ 백운산을 오를 때 가장 짧은 코스로 선택되는 병암계곡. 노각나무, 서어나무, 고로쇠나무가 유난히 많다.

개암나무, 겨우내 신부를 기다리다

백운산에는 백운란, 백운배, 백운쇠물푸레, 백운기름나무, 나도승마, 털노박덩굴, 히어리 같은 희귀식물이 살고 종종 백년 넘게 묵은 산삼이 발견된다고 하니 그만큼 많은 식물들이 살기에 적당한 환경임이 틀림없다. 계곡에 들어서면 고로쇠 수액으로 유명한 고장답게 고로쇠나무가 단연 많다. 그 중 눈에 뜨이는 나무는 노각나무다. 노각나무는 생장 속도도 느리거니와 수피가 얇아 멀리서 바라보아도 그 속이 매우 단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과나무와 비슷한 얼룩무늬가 아름다워 비단나무라고도 불리는데 세계적으로 다섯 종류밖에 없는 이 나무는 우리나라의 특산나무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넓적한 잎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에는 노랗게 단풍이 든다. 노각나무를 바라보노라면 일면 화려한 듯하면서도 개결한 선비를 보는 듯하다. 사방으로 올곧게 뻗은 뿌리는 대지를 단단히 움켜쥐고 결코 무리하게 뻗지 않는 가지와 하얀 꽃에선 뿌리 깊은 나무에서나 볼 수 있는 겸양의 덕을 엿볼 수 있다


주변에는 고욤나무, 때죽나무, 산딸나무, 뽕나무, 다릅나무, 서어나무, 비목나무가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비목나무가 만주 땅 간도에도 있느냐고 묻는다. 묻는 의도를 알 것 같다. 가곡의 비목을 연상하고 불쑥 던진 말이다. 노래의 비목은 전장에서 외로이 죽어간 주검 앞에 세워준 나무 비(碑)이고 이 나무는 추운 곳을 싫어해서 해안가 산지에서 주로 자라는 녹나뭇과의 낙엽 지는 큰키나무다. 나무 사이로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는 계곡가 양지 녘에는 개암나무가 꽃을 피웠다.

개암나무는 자작나뭇과의 나무답게 자작나무나 오리나무처럼 겨우내 수꽃을 내놓고 신부를 기다린다. 암꽃은 꽃이라 해봐야 지름 2mm 내외의 빨간 꽃잎이 가지 끝에서 나갈까 말까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인고의 세월을 기다린 신랑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이어서 장대한 키에 짙푸른 잎을 단 독일가문비 숲이다. 백운산에는 서울대 남부 연습림의 연구실이 위치하고 있어 갖가지 수종들이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일가문비나무는 어린 가지가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독일 삼림의 90% 이상이 소나무와 가문비 두 가지로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작으나마 독일의 흑림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문비 숲을 지나면 가문비의 그늘이 끝나기 전 굴참나무 앞에 합다리나무가 우뚝 서 있다. 언뜻 나무 껍질만 보아서는 느티나무로 오인할 수 있는 나무로서 나도밤나무와 자생지가 같다. 이 두 나무와 같은 자리에 나오는 또 다른 나무로는 비목나무가 있다. 합다리나무, 나도밤나무, 비목나무 이 셋은 친구처럼 잘도 붙어다닌다. 이곳 역시 이 세 나무가 한자리에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셋 중 하나만 안 보여도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진틀에서 1.8km 지점 이정표는 해발 약 650m 되는 지점이다. 계곡에는 말발도리, 딱총나무, 때죽나무가 나오고 해발 700m 되는 지점부터는 까치박달나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곳은 진틀삼거리로 오른쪽으로 가면 정상 1.3km 되는 곳이고 왼쪽으로는 신선대를 지나 정상으로 갈수 있는 길이다.

이곳에서 정상으로 직접 오르는 길은 통나무를 박아 계단을 만든 곳으로 다소 밋밋하다. 일행은 신선대를 거쳐 오르기로 하고 왼편 지능선을 오른다. 약간 급한 사면이지만 걸을 만하다. 백운산을 올라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마디로 참 부드러운 산이라고들 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족 산행으로도 손색 없는 유순한 산이기 때문이다. 계곡은 완만하고 능선은 부드럽다. 한번씩 지능선에 도달하기 위해 된비알이 있지만 산이란 오르고 내리고 하기에 ‘山’이잖는가!


△ 정상에서 호남정맥을 바라보는 필자. 왼쪽 봉우리가 억불봉이다.

때죽나무 사라지면 쪽동백나무가…

지능선을 오르는 길에는 층층나무, 굴참나무, 고로쇠나무, 비목나무 같은 큰키나무와 작은 키인 때죽나무, 떨기나무인 병꽃나무와 조릿대가 경사면을 붙들고 있다. 오르다 잠시 쉴 수 있는 참에는 쇠물푸레나무, 누리장나무, 작살나무, 고추나무, 국수나무 같은 떨기나무들이 등산로 주변을 에워싸고 지능선에 오르니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능선상에는 신갈나무, 철쭉, 생강나무, 노린재나무, 쪽동백나무, 노각나무가 바람 소리에 비해 제법 큰 키로 자라고 있다. 고도를 재보니 900여m 지점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때죽나무가 사라지고 쪽동백나무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 두 나무는 같은 때죽나뭇과로 꽃과 열매, 수피가 비슷하다. 언뜻 보면 구별이 잘 안 되는데 여름에는 쉽게 구분이 된다. 때죽나무는 잎이 작고 긴 타원형이며 끝이 뾰족한 반면 쪽동백나무는 잎이 손바닥만큼 크고 원형에 가깝다. 일반적으로는 작고 두꺼운 잎을 가진 나무가 좀더 추운 곳에 사는 법인데 이 두 나무는 자생지가 거꾸로 나타난다. 쪽동백나무는 좀더 추운 곳인 북부지방이나 높은 곳에서 자라고 때죽나무는 경기 이남이나 낮은 곳에서 주로 자란다. 자연은 때로 천연덕스럽게 상식 밖의 현상이 나타나 당혹스럽게 만든다.


△ 가지가 3개로 갈라진 삼지닥나무.

이곳에 나타나는 노각나무는 아래쪽에 사는 노각나무와는 수피 색깔이 사뭇 다르다. 아래쪽에서는 떨어져나간 쪽에 노란색이 많이 도는 반면 위쪽에는 핑크색이 돈다. 능선상에는 묘지 1기가 있다. 오르면서 주변을 보니 사방이 큰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이다. 마치 오대산 비로봉을 오르는 능선 같은 연화부수형의 형국이다.

묘지를 지나면 해발 1천m 되는 지점이 바위지대다. 바위는 크게 둘로 쪼개진 크레바스 지역이므로 하늘을 보고 걷다가는 푹 빠질 염려가 있다. 크레바스 지역을 통과해 왼편 등산로를 조금 벗어나면 푸른 잎을 단 나무들이 늠연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상나무다.

구상나무는 아무 데서나 살지 않는다. 높은 곳 바위틈에서 찬 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다. 그런데 요즘 구상나무에 문제가 생겼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어 산꼭대기에 사는 한대성 수종들이 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가려야 갈 수 없는 벼랑 끝에 선 나무들이 안쓰러울 뿐이다.

동동마을 하산길은 감동이어라

바위지대 위에는 신선대라는 팻말과 함께 삼거리가 나온다. 앞에는 우뚝한 바위가 신선대임을 알겠고 오른쪽 나뭇가지 사이로 백운산의 상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신선대에서 정상 가는 능선 길은 참으로 따뜻한 길이다. 주능선의 바위들이 바람을 막아주기에 철쭉은 한없이 키를 키우고 철 계단을 올라서면 정상이 지척이다. 백운산의 주능선에는 철쭉이 많다. 진달래와 히어리의 꽃물이 빠지고 나면 철쭉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 개암나무의 암꽃과 수꽃, 늘어진 것이 수꽃이다.

정상은 바위덩이로 이루어져 있다. 병암 계곡쪽으로는 단애로 이루어져 멀리 진틀의 시멘트 포장길이 아스라이 보이고 사방이 확 트여 있다. 조망이 시원하다. 북으로는 지리산의 장릉이 장쾌하게 펼쳐지고 동남방으로 하동의 섬진강이 반짝거린다. 서쪽으로는 숨가쁘게 달려온 호남정맥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지고 발밑에는 백운산 계곡이 창연하게 펼쳐진다. 그 중 가장 유혹을 느끼는 것은 억불봉으로 흘러내리는 굼실굼실한 능선이다. 양쪽 계곡에서 올라오는 봄기운을 한껏 받으며 걷고 싶은 충동 때문이리라.

정상에서 내려서면 미역줄나무와 신갈나무, 철쭉이 등산로 주변을 에우고 내려서는 사면에는 히어리 군락이다. 히어리는 씨앗이 대립종자이기 때문에 씨앗을 멀리 퍼뜨리지 못하고 군락을 이루며 산다. 올해 같은 날씨면 4월10일경 백운산을 찾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하산은 바로 진틀로 내려갈 수도 있고 헬기장에서 백운암으로 갈 수도 있지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억불봉 방향 노랭이재에서 광양제철 수련관을 거쳐 동동마을로 하산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길은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제 막 섬진강에 발을 담근 백운산의 옷자락에 꽃물이 들어 올라온다. 다음은 다압면의 청매실 농원에 가서 섬진강을 바라볼 차례다. 매봉에서 능선 하나가 흘러내리다 마지막으로 솟구친 코숭이, 쫓비산 자락에 매화꽃이 화들짝 피었다. 매화꽃 향기에 첨벙 온몸을 빠뜨리고 섬진강을 바라본다.

“매화는 본래부터 환히 밝은데 달빛이 비치니 물결 같구나.

서리 눈에 흰 살결이 더욱 어여뻐 맑고 찬 기운이 뼈에 스민다.

매화꽃 마주보며 마음 씻으니 오늘 밤엔 한점의 찌꺼기 없네.”

- 율곡 이이 -


<산행 길잡이>


< 제1코스: 진틀 → 삼거리 → 신선대 → 정상 → 삼거리 → 진틀(8km)

제2코스:진틀 → 삼거리 → 신선대 → 헬기장 → 백운암 → 선동(12km)

제3코스: 진틀 → 삼거리 → 신선대 → 정상 → 한재 → 논실(10km)

제4코스: 진틀 → 삼거리 → 신선대 → 정상 → 억불봉 → 동동마을(16km)

<주변 볼거리>

*옥룡사지: 도선 국사가 심었다는 동백 숲이 유명(4월15일경).

*서울대 남부 연습림: 너도밤나무와 테다소나무 숲.

*다압마을: 섬진강과 매화꽃 그리고 맹종죽 숲(3월25일경).

*하동송림: 솔향기와 더불어 섬진강의 물을 만져볼 수 있는 곳.

<먹을데>

광양숯불고기 061-761-6100, 별미식당 061-762-9119,

농심정 061-763-0609. 7088

<잘데>

동곡계곡에는 고로쇠 약수로 유명한 곳이라 잘 데가 많다.

<교통>

자가용: 광양IC에서 우회전 옥룡면 방향 20분 거리.

대중교통: 광양에서 답곡행 군내버스. 진틀, 논실 방향은 하루 4회. 광양에서

07:00, 10:20, 2:50, 5:50.

안내문의: 광양시청 문화홍보 담당관실 061-797-2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