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이하기 위해 찾아간 한라산…높이마다 다른 식생들을 골라 맛보는 쾌감
▣ 사진 · 글 우종영/ 야생화 사진 작가 · 나무 전문가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 경칩(驚蟄). 삼라만상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튀어 올라온다는 봄(spring)이다. 봄은 왔다지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고 파고드는 꽃샘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한다. 지난 겨울 눈이 오는 곳은 엄청나게 쌓이고 안 오는 곳은 산에서 먼지가 나도록 건조한 ‘부익부 빈익빈’의 계절이었다. 어설프게 지나간 겨울과 꽃내음 가득한 봄을 한꺼번에 맞이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한다. 창공을 가르고 이륙한 비행기는 주스 한잔 마시고 창밖을 내다보는 사이 어느새 제주도다. 제주의 한라산은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긴다 해서 한라(漢拏)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1950.1m)이다.

△ 산호초를 연상케 하는 설화. 구상나무 등이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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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많아서 삼다인가
한라산은 바다에서부터 시작해 2천m 가까이 솟아오른 산이기에 나무의 분포가 뚜렷한 수직분포를 보이고 있다. 해발 600m 이하의 저지대에는 붉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와 가시나무류, 생달나무, 센달나무, 후박나무 같은 난대성 나무들이 자라고, 고도 600~1400m의 중복에는 개서어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 물참나무 같은 온대성 낙엽활엽수림, 고도 1400m 이상의 고지대에는 구상나무, 눈향나무, 주목 같은 침엽수와 산철쭉, 털진달래, 시로미 같은 키 작은 아한대성 나무들과 초원이 형성돼 있어 산을 오르며 다양한 식생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한라산 등반 코스는 대부분 폐쇄되고 성판악에서 백록담에 올라 관음사로 내려가는 길과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을 거쳐 영실로 내려가는 코스, 두곳뿐이다.
성판악 코스는 경사가 완만하게 오르지만 코스가 길어(18.3km), 아침 일찍 출발해 꾸준히 걸어야 하산할 수 있다. 어리목 코스는 비록 백록담을 오르지 못하지만 코스가 짧아(8.4km), 쉬엄쉬엄 올라도 시간에 무리가 없고 경치가 좋아 가슴에 담아오기도 벅찬 곳이다.
제주의 봄날씨는 변화무쌍하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눈이 펑펑 내리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맑은 하늘에 푸른 물감을 풀어 저으려는 양 방풍림의 한쪽 끝자락이 한들거리기도 한다.
제주도를 흔히 삼다(三多)의 섬이라고 하는데 다녀와서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다고 하는 사람은 조선시대에 귀양 갔다온 사람일 것이고, 돌과 바람과 말이 많다고 하면 가을에 관광 다녀온 사람, 돌과 바람과 나무가 많다고 하면 봄에 다녀온 사람이다. 왜냐하면 제주의 봄바람은 마파람과 뒤바람이 뒤섞여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거니와 그악스러워 밭과 집 둘레를 호석으로 쌓아올리고도 모자라 키가 쭉쭉 뻗은 삼나무나 구실잣밤나무, 후박나무 같은 늘 푸른 나무들을 곳곳에 심어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보다 잎새로 빠져나가는 바람소리에 귀로 나무들을 느끼기 때문이다. 시나브로 쌓인 눈에 통제되었던 도로가 뚫리면서 제주도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 등반이 허락됐다.
해발 970m 어리목 입구에서 매표소까지의 5분 거리는 포장도로다. 길 양옆에는 눈을 털고 고개를 내민 제주 조릿대가 반긴다. 앞에는 사제비능선과 망체오름, 어슬렁오름의 동실동실한 멧부리들이 유순하게 다가온다. 제주의 오름들은 대부분 사발 엎어놓은 모양이라 아침 안개가 오름의 허리를 감돌면 천년 고도의 왕릉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곳 매표소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는 4.7km, 일반 등산객 걸음으로 2시간 거리다.
까마귀와 겨우살이의 공존
들머리에 들어서면 물참나무와 졸참나무, 서어나무들이 섞여서 자라고 이어 푹 꺼진 계곡이 어리목 계곡이다. 이곳은 평상시에는 물이 없지만 산 위에서 비가 내리면 갑자기 물이 불어 건널 수 없는 위험한 곳이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다. 한두 시간 기다리면 평상 수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계곡을 통과해서 곧바로 만세동산까지 오르는 길 2km 구간에는 쉴 만한 참이 없는 능선이다. 이 구간은 호흡조절을 해가며 천천히 올라야 한다. 길은 나무계단으로 이루어졌으나 그 위로 눈이 1m가량 쌓여 있어 계단을 밟지 않고 오르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러나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허방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 굴거리나무 군락지(성판악 900m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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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푹 쌓인 눈길 위를 걸으니 옛날 산 친구 생각이 난다. 백두대간은 물론이고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닌 뒤로 그가 한 한마디, “이제 눈 쌓인 겨울산만 다니기로 했다”는 것이다. 연유를 물으니 눈이 쌓이면 나무 뿌리를 밟지 않아도 되고 흙이 패어나가지 않아 산과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덜하다는 얘기다. 그렇다. 미안한 마음 없이 나목을 바라보는 것 또한 행복 아니겠는가.
오르막길에는 서어나무, 단풍나무, 물참나무, 엄나무들이 쭉쭉 뻗어오르고 서어나무와 물참나무에는 등수국이 붙어 자라고 있다. 등수국은 마디에서 공기뿌리가 나와 나무거죽이나 바위에 붙어 자라는 착생식물로 초여름에 수국과 같은 꽃이 시원하게 핀다.
해발 1100m라는 표지판 주변에는 서어나무 아래에 주목나무가 자라고 푯말 앞에는 수피가 거칠거칠하고 가지 끝에 수꽃을 내민 새우나무가 서 있다. 제주도에는 까마귀가 많다. 들판에도 산에도 무리지어 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까마귀들이 우리 일행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쫓아온다. 왜 그럴까?
우리는 다른 등산객들과는 달리 천천히 걷기 때문에 따로 점심시간이 없이 행동식으로 때운다. 반추동물처럼 오물거리며 오르는 사이 떨어진 부스러기가 까마귀들의 눈에 포착된다. 이 나무 저 나무 옮겨다니며 쫓아오다가는 마침 알맞게 익은 겨우살이에 눈길을 보낸다.

△ 들에 핀 수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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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살이는 주로 참나무나 밤나무에 뿌리를 박고 자생하며 스스로 광합성을 하여 양분을 만들기도 하지만 기주식물에서 수분과 양분을 빼앗기 때문에 반기생식물이다. 겨우살이는 스스로 나무를 옮겨다니며 번식할 수 없기에 새들을 이용한다. 나무 열매도 다 떨어지고 눈이 쌓여 먹을 것이 귀할 즈음에 연노랑색의 탐스런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새들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끈적끈적한 열매의 즙액을 먹으려면 씨앗을 발라내야 한다. 마침 우리를 쫓아오던 까마귀 한 마리가 열매를 물고 와서는 시연을 한다. 물참나무의 골 파인 곳에 열매를 넣고는 콕 쪼는 순간 투명한 즙액이 튀어나온다. 이때를 놓칠세라 쪽 빨아먹고는 눈밭에 내려와 입을 닦는다. 끈적끈적한 즙액을 닦기 위함이다.
만세동산에서 탄성을 지르다
곧이어 해발 1200m 지점에 송덕수라는 팻말이 붙은 물참나무가 나온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귀할 때 도토리를 많이 맺어 기근을 해결했다 하여 그 은공을 기리기 위해 매년 재를 올렸다 한다. 한때는 기골이 장대해 열매 꽤나 맺었을 터인데 고종명(考終命)에 이르렀음인지 우듬지는 죽고 몇 가지만 살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쇠락한 원인이 연로함에도 있겠지만 가지 끝 죽은 위치로 보아 까마귀들의 무분별한 식습관(겨우살이 열매먹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왜냐하면 겨우살이 뿌리가 파고들면서 가지가 쇠약해지고 바람에 부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 얼음을 뚫고 올라오는 복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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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400m 지점에 이르면 구상나무들이 간간이 나타나고 소나무가 보이기 시작하며 앞이 확 트인다. 사제비동산에 이른 것이다. 여기까지 오르는 데 힘들었다면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이곳은 옛날 방목을 하던 곳이라 넓은 초원이 형성돼 있다. 그렇다고 풀들이 초원을 덮은 것은 아니다.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바람에 납작해진 꽝꽝나무, 제주조릿대, 털진달래, 산철쭉, 매발톱나무, 산초나무, 보리수나무, 산딸나무, 신갈나무, 구상나무들이 한줌의 흙이라도 놓칠세라 꼬옥 움켜쥐고는 바위틈에 의지해 옹송그리고 있다. 이들이 없다면 사제비동산이나 만세벌판은 이미 깊은 계곡으로 변했을 것이다.
사제비동산에서 만세동산은 800여m의 거리다. 손에 잡힐 듯 오르고 내리는 이들이 한눈에 보인다. 파란 하늘에 흰 눈 사이로 비쭈룩이 내민 조릿대 잎을 보며 오르다 보면 어느새 만세동산이다. 정면에는 백록담의 화구벽이 왕관처럼 빛나고 민오름과 장구목오름, 윗세오름의 유연한 마루금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러시아에 간들 이런 설원을 볼 수 있을까? 모두들 탄성을 내뱉는다. 누군가 툭 터져나오는 감정을 눈 위에 써놓았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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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후박나무. 잎새로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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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동산에서 윗세오름까지 1.5km 구간은 평원이다. 골짜기에는 구상나무가 눈을 뒤집어쓰고 등산로에는 길을 잃지 않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빨간 깃대를 꽂아놓았다. 이 구간은 일기 변화가 심해서 길을 잃을 염려가 많다. 안개라도 낀 날이면 방향감각을 잃어 제자리에서 뱅뱅 도는 링반데룽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윗세오름 대피소가 가까워지면 동실동실한 흙더미 위에 눈향나무들이 얹혀져 살고 있다. 모두들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윗세오름 대피소(1700m)는 두 동의 건물과 화장실 그리고 태양열 집열판으로 이루어졌고 컵라면과 간단한 행동식을 판다. 대피소에서 영실 가는 길은 서쪽으로 나 있다. 이곳에서 영실휴게소까지는 3.7km, 1시간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윗세오름을 오른쪽에 두고 가는 자드락길은 너른 평원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다. 시로미와 눈향, 털진달래 같은 나무들이 잠자고 있을 설원은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바람의 흔적이 나울거리며 일렁이는 마루금들이 검처럼 번득인다. 윗세오름에서 구상나무밭까지는 경사가 전혀 없는 평지다.

△ 만세동산에서 윗세오름 가는 길, 멀리 백록담의 화구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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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숲
구상나무밭에 들어서면 남태평양의 산호초 속을 유영하는 듯하다. 구상나무와 신갈나무, 주목, 마가목, 좀고채목이 눈 속에 묻혀 기기묘묘한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상나무밭이 끝나면 일망무제(一望無際) 툭 터진 전망대다. 대협곡이 앞을 가로막고 마라도와 가파도, 섶섬과 범섬, 서귀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한라 제일의 경관이다.
병풍바위를 향해 내려서는 길(1600m) 왼쪽은 낭떠러지요 오른쪽은 털진달래와 작은 주목나무들이 둥글둥글하게 자라고 구상고사목이 눈에 뜨인다. 눈을 들면 멀리 서편의 오름들이 올망졸망하다. 이곳 경관은 지나는 나그네를 그냥 보내지 않고 한참을 바위 위에 앉아 있게 한다. 병풍바위가 끝나면 길은 남사면 계곡으로 내려가게 된다. 물을 건너면 소나무숲이다. 영실의 기암들을 배경으로 쭉쭉 뻗은 소나무들을 보노라니 신비한 감마저 든다. 이곳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숲으로 선정된 아름다운 숲이다.

△ 영실 1600m 전망대에서 본 서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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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숲을 지나면 산행도 끝이 난다. 휴게소에서 목을 축이고 앞을 보니 누워 있는 긴 아스팔트 길이 숲을 삼키려는 보아 뱀 같다는 착각이 든다. 사람이 나무를 키우면 나무는 사람의 영혼을 키운다고 한다. 이런 숲들이 굄을 받아 후손들도 이런 아름다운 숲을 볼 수 있도록 고이 물려주려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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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길잡이>
1코스: 어리목 코스
어리목광장 → 윗세오름 → 대피소 → 영실휴게소(8.4km)
코스가 짧고 경치는 좋으나 정상에는 오를 수 없다.
2코스: 성판악 코스
성판악 → 진달래밭 대피소 →백록담 → 관음사(18.3km)
일찍 출발해서 12시 전까지 진달래밭을 통과해야 한다.
3코스: 어승생악자연학습 탐방로
어리목 광장 → 어승생악 정상(1.3km)
가벼운 등산객을 위한 추자도 코스와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다 보인다.
※4월까지는 아이젠 스패츠 지참
<주변 볼거리>
* 안덕계곡: 웅장한 협곡과 난대림의 보고(지나다 들러보면 좋을 듯)
* 천제연 폭포: 3단 폭포와 다양한 난대림
* 선흘곶자왈: 난대림의 원시 상태를 볼 수 있음
* 비자림: 국내 최대의 비자나무 군락지
* 성산일출봉: 해는 매일 뜨지만 성산에서의 일출은 남다르다.
<민박안내>
제주시 관광과 064-750-7544, 뜨리바다 펜션 064-764-5500
<식당>
대상회관(제주시 버스터미널) 064-702-7400
<교통>
렌터카: 제주펜션타운에서 운영, 064-711-9088(1일 사용 35,000)
대중교통: 윗세오름- 제주버스터미널에서 중문 가는 버스(1시간20분 간격)
성판악- 제주버스터미널에서 서귀포 가는 버스 (20분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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