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주운 한 마디]
스페인 - “너를 만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 김남희/ 여행가 www.skywaywalker.com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긴 여행을 하는 처지인 덕에 사람들에게 호기심 어린 질문을 받고는 한다. 그중에 가장 자주 받는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여행 왜 하세요? 둘째, 혼자 여행하면 외롭지 않으세요? 셋째, 그동안 몇 개국 여행하셨어요? 넷째, 지금까지 다닌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이 네 가지 질문은 모두 내가 싫어하는 질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 질문이 마지막 질문이다. 변덕스러운 나는 여행하는 모든 나라와 사랑에 빠지고는 했기에, 내게 가장 좋은 나라는 지금 여행하는 나라인 셈이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는 집요한 이들을 위해 따로 접대용 대답을 준비해놓았다). 그럼에도 만약 올해 최고의 여행지가 어디였냐는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지금 내 대답은 명확하다. 내가 사랑에 빠졌던 그 많은 곳들 중에서도 가장 특별했던 ‘올해 최고의 여행지’를 이제 소개해보자.
진심이 담긴 순례자들의 미소
길이 하나 있다. 1천 년의 눈물과 땀이 밴 길이다. 길은 여러 곳에서 시작되지만 길의 끝은 하나로 모인다. 1천 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지팡이를 짚고, 조개껍질을 배낭에 달고 그 길을 걸어왔다. 한 달을, 두 달을, 어떤 이들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곱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던 길. 그래서 길의 끝은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다. 그 길의 이름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다.

△ 황금빛 밀밭과 돌로 지어진 작은 마을은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사진/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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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특별하다. 남과 나눌 준비가 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손 내밀 준비가 된 사람들이 그 길을 찾아온다. 그래서 그 길 위에서는 언제나 진심이 담긴 미소가 사람들 사이에 오가고, 모르는 이와도 다정한 인사를 나눈다. 아픈 이에게 약을 나눠주고, 목마른 이에게 물을 건네고, 배고픈 이에게 밥 한 그릇을 덜어주고, 아픈 다리를 정성껏 주물러주는 사람들이 그 길에는 가득하다.
남들보다 없어 보이는 얼굴 탓일까. 혼자 걷는 아시아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길을 걸어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내게 약을 내밀었고, 밥을 해 먹였고, 외로움을 나눠주었고,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진 게 없어 돌려줄 게 없는 나는 늘 미안했다. 그 길에서 사람들은 내게 말하곤 했다. “너를 만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너를 돕게 되어 정말 기뻐.” “네 웃음이 나를 행복하게 해.” 지구 위에서 길을 걸으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끝까지 그 길을 걸어 완주하는 건 쉽지 않다. 배낭은 지구를 짊어맨 듯한 무게로 당신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고, 태양은 당신을 익힐 것이고(정말이지 스페인의 태양은 우리가 나고 자란 땅의 것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산티아고는 세상의 끝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모국어와 김이 솟는 하얀 밥과 김치를 포기해야 하고, 인터넷조차 그림의 떡일 경우가 많다. 반면에 그 길은 세상에서 가장 걷기에 편하고(국도나 지방도로를 걸어야 했던 한반도 남단의 국토종단과 비교하면 이 길의 안전도와 보행자를 위한 배려는 감동이다), 당신이 굳이 옹색한 한국인의 이미지를 남겨야만 하겠다면 돈을 내지 않고도 잘 수 있는 숙소들이 줄을 서 있고(그 길의 숙소들이 순례자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에 의지하는 건 1천 년을 이어온 전통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완주증서까지 받을 수 있어 의심 많은 당신의 벗들에게 당신의 부재에 대한 증거를 들이밀 수도 있다.

△ 하루의 걷기를 마친 순례자들이 숙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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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끝에서 길을 묻다
길의 끝에 서면 아무리 무딘 심장의 소유자라도 눈물겹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세상에 나온 모든 목숨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될 것이므로. 단 한 번뿐인 이 삶을 누리고, 사랑하고, 연대하며 살아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길이 가르쳐준다.
삶에 대해, 살아온 시간에 대해, 지금 가고 있는 길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는 길. 자신의 맨얼굴과 대면하게 되는 길. 그래서 길의 끝에 서면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낼 수밖에 없는 곳. 간절한 질문 하나를 품은 이들이여, 오래 잊혀지지 않을 이름 하나를 품고 있는 이들이여, 자신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싶은 이들이여, 이 길을 찾아가자. 가서 걷자. 세계사에 약한 당신을 위해 다시 한 번 친절을 베푼다면, 그 길의 이름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 칠레가 아니라 스페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