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숙/ 순천대학교 교수 · 이론화학 jsg@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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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레이션/ 유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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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생활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근래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통신이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개인용 컴퓨터의 5대 용도를 들 때 통신은 가장 낮은 순위에 있었다. 즉, ‘워드프로세싱’ ‘스프레드시트’ ‘그래픽’ ‘데이터베이스’의 다음에 ‘통신’을 열거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통신은 장차 최고의 분야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현재는 가장 중심적 지위에 올라 다른 분야를 부수적인 기능으로 거느리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 힘들다. 어쩌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묵직한 구형 휴대전화를 보면 마치 고대의 유물을 보는 듯 느껴진다.
이와 같은 ‘통신 혁명’의 배경에는 디지털이 자리잡고 있다. 디지털의 어원인 ‘디지트’(digit)는 손가락 또는 발가락이란 뜻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 디지털은 ‘계산’에 관련되는 개념이며, 똑똑 끊어지는 ‘이산적’ 대상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디지털을 마치 초현대적 관념처럼 여기지만, 실제로는 아득한 원시사회부터 사용된 최초의 계산법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사람들은 ‘주판’이라는 좀더 편리한 도구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어디가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동서양에 걸쳐 널리 사용된 주판도 낱낱의 알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디지털적 도구이다.
그러다 근대에 들어 아주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다. 원시시대로부터 꾸준히 축적된 여러 기술들이 근대의 유럽에서 합쳐져 ‘시계’라는 놀라운 발명품으로 결집되어 나타났다. 시계는 그것을 만드는 여러 기계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이후 더욱 정교한 과학이 탄생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데카르트는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유명한 ‘기계론적 세계관’을 내세웠다. 이에 따르면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은 정교한 기계적 구조가 겹겹이 쌓여서 만들어진 거대한 기계와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로부터 오늘날의 ‘전자시계’가 나오기 전까지의 시계는 이른바 아날로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시계들은 추나 스프링의 움직임과 같은 연속적 운동을 이용해서 모든 수가 분포하는 문자판 위에 시간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때부터 아날로그 시대의 전성기가 펼쳐진다고 할 수 있다. 시계뿐 아니라 근대의 산업혁명을 촉발하고 널리 전파시킨 기계들은 거의 모두 아날로그 방식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계산기도 마찬가지였다. 파스칼이 발명한 최초의 수동식 계산기와 증기기관까지 동원한 배비지의 계산기도 모두 기계식이자 아날로그식이었다.
하지만 2차대전 무렵에 출현한 전자식 계산기 에니악(ENIAC)은 다시금 디지털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이번의 변화는 다른 앞선 변화보다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훨씬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디지털은 인간이 주고받는 모든 정보의 기본 단위가 되려 하고 있다. 나아가 세상의 구성 및 작동 방식도 디지털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의 기계적 세계관을 뛰어넘어 만물의 본질이 정보이자 계산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한다. 컴퓨터는 몰라도 최소한 휴대전화와 인터넷은 외면하기 어려운 현대의 데카르트는 “계산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되뇌는 듯하다.
☞ ‘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는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고중숙 교수와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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