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 · 이론화학 jsg@sunchon.ac.kr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학문의 시조’라고 불린다. 그가 이런 영예를 안게 된 것은 연역적 논리 전개를 최초로 확립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이전까지 사람들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발견하고 기술하는 것에 만족했던 듯하다. 예를 들어 변의 길이가 3, 4, 5인 삼각형은 직각삼각형이란 사실은 아득한 고대로부터 알려져왔다. 그러나 연역적 논리에 따라 엄격히 증명된 것은 탈레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피타고라스에 의해서였다. “지름에 대한 원주각은 직각이다”는 것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몇 가지의 정리는 탈레스가 직접 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의 이런 노력에 대하여 “탈레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아느냐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을 더 정식의 용어로 바꿔서 쓴다면 “탈레스는 ‘실체론’보다 ‘방법론’을 중요시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진리라는 실체’ 못지않게 ‘진리에 다가서는 방법’을 중요시한 것이야말로 고대 그리스 철학을 다른 문화의 학문들과 확연히 구분짓게 하는 결정적 차이점 가운데 하나다. 이런 정신은 탈레스보다 약 3세기 뒤에 출현한 유클리드란 천재에 의하여 절정의 꽃을 피운다. 유클리드는 이전의 수백년 동안 축적된 수학적 진리를 모으고 자신의 공헌까지 깃들여 ‘공리계’라는 엄밀한 틀 안에서 정교한 논리를 펼쳐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기하학 원론>은 역사상 성서 다음의 베스트셀러로 인정될 만큼 인류의 정신사에 우뚝 솟아 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이 얻어졌을 때 단순히 적용해보고 별 탈이 없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다음에 또 그와 비슷한 상황이 나타나면 별다른 생각 없이 종래 해오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다. 하지만 세상의 여러 상황들이 완전히 똑같은 형태로 재연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따라서 어떤 방법론이라도 그 메커니즘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는 한 뜻밖의 위험을 맞이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미리 예상하고 대비하기보다 문제가 드러날 때까지 방치하고 외면하고 심지어 밀고 나가기까지 한다. 마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로 인한 잘못된 결과의 발생이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듯도 싶다.
우리 사회의 이런 경향은 예로부터 수없이 지적돼왔다. ‘성장 제일주의’ ‘결과·실적·성적 지상주의’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 ‘대학만 가면 된다’ ‘자백만 받으면 된다’ ‘승리하고 당선만 되면 된다’ ‘안으로는 썩더라도 겉만 멀쩡하고 번지르르하면 된다’ 등등 실체론과 명분에 치중하고 방법론과 내실은 소홀히 해온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최근 불거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의하여 이와 같은 구시대의 물줄기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중요한 계기가 형성될 가능성이 눈에 띈다. 기업 경영도 노사간의 협의를 존중하고, 중앙정부의 일이라도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하며, 정치도 권모술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정도’에 따라야 한다는 의식이 고양 및 정착되고 있다. 실제로 방법론은 과정에 적용된다는 속성상 일과성이 아니라 지속성이 중요하다. 다가오는 4월에는 이런 의식이 뚜렷이 표출되고 대세로 자리잡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