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석제의 음식이야기 ] 2003년12월10일 제488호 

[어란] 오, 네가 그 전설의 알이로구나

어느 미식가가 입에 침을 튀기며 설명하던 어란의 신비한 맛, 직접 먹어 보니 글쎄…

내가 생애 최초로 월급쟁이가 된 때는 1986년 여름이다. 남들처럼 나도 ‘회식’이라는 세례 절차를 거쳐 월급쟁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남들과는 약간 다르게 회식의 주최자 내지는 주도자가 대단한 미식가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미식가를 만나는 건 자연농원 사파리에서 사자 보는 것만큼이나 드문 일이었다. 그는 늙은 사자처럼 자신이 그때까지 사냥해온 숱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도도하게 늘어놓았는데 처음 듣는 나로서는 그저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내 앞에 놓인 접시에 무슨 음식이 올라가 있는지는 논외였다.



회식이 두번 세번 거듭되면서 차츰 나도 내 앞에 놓인 음식과 미식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식의 차이점에 관해 의식하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도 어느 때부터인가 ‘젊은 피의 수혈’ 같은 결정적인 계기를 맞아 ‘생명의 도약’(elan vital)을 하지 못하고 반복의 악순환 속에 들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한편 나보다 빨리 입사해서 회식에 여러 번 참석했던 사람들은 적당히 이야기를 듣는 시늉만 한다는 것도 눈치챘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음식에 대해 무식했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서 남들보다는 오래도록 그가 주최하고 주도하는 술자리에 동반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입으로만 듣던 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어란(魚卵)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어란은 숭어의 알로 만든다. 숭어는 고기 자체는 별로 맛이 없다. 그러니까 회도 구이도 잘 안 되고 탕 정도로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숭어를 잡으면 배를 갈라 알을 꺼낸다. 이때 알집이 터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알집을 살살(이야기꾼은 이런 부사어와 형용사어에 강하다, 억양과 표정, 어휘 모두) 꺼내어서 소금물에 담갔다가 간장을 희석한 물에 씻은 뒤 헛간 같은 서늘한 곳에 걸어놓고 참기름으로 빈틈없이 칠한다. 매일 두어 차례, 참기름이 마르지 않게 칠을 하여 수십일을 칠하면 알집이 굳어 꾸들꾸들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어란이 완성되면 잘 싸서 임금에게 진상도 하고 주변의 명문대가에 팔았는데 요즘은 몽땅 일본으로 수출한다. 이래저래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은 먹기 힘들게 되어 있었다. 값도 무척 비싸다고 했다. 참기름도 참기름이지만 정성이 더 큰 요소로서 자칫 기름칠을 게을리하면 어란이 되어가는 도중에 산패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약 20여분에 걸친 음식 이야기가 끝이 나고 마침내 그 귀하다는 어란이 주방장 도마 위에 올라오고 내 앞에는 눈부시게 흰 접시가 하나 놓였다. 접시 위에는 아스파라거스인지 뭔지 하는 서양식 장식이 놓였지만 나는 도저히 그 거무튀튀한, 도마 위의 어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도대체 저 귀하다는 걸 어떻게 먹을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입을 크게 벌리면 한입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이윽고 주방장은 칼을 가지고 나와서 어란을 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칼은 그 주방에서 가장 얇은 칼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썬 어란이 내 접시 위로, 그리고 미식가의 접시 위로 날라졌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손으로 그 어란을 집어서 불빛에 대보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문자가 쏟아져나왔다.

“이거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투철(透徹)하는군요. 와, 사장님 얼굴이 다 보여요.”

“야, 빨리 먹어. 잘못하면 손에서 녹아버린다니까.”

“와, 이거 두장을 겹쳐도 얼굴이 보여요. 세장도 된다. 신기하네, 정말.”

“안 먹을 거면 나를 줘. 방정 그만 떨고.”

뺏기기 전에 얼른 입에 집어넣어 보았는데 그 맛은 글쎄, 찝찔한 기름 맛이라고나 할까. 하긴 워낙 얇아서 입 안에서 살살 녹기는 했다.

지금 어란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니(http://www.uribada.com/main2_2_13.htm) 영산강 하구의 영암어란을 최고로 치는 모양이다. 불에 달군 칼로 1.5~2mm의 두께로 얇게 썰어 ‘앞니 사이에 끼우고 조근조근 깨물면 입 안 가득히 향이 퍼지며 구수하니 단맛이 나’는 게 어란이다. 이 어란과 이야기 속의 어란은 같을까, 다를까.

성석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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