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산 기자의 학교!]
어느 10대 자퇴생의 학교, 학교 밖의 세상, 그리고 아픔에 대한 이야기
겸, 혹은 김경묵. 나이 19살. 키 168cm. 몸무게 52kg. 자퇴생. 동성애자. 청소년 기획위원 회의에서 처음 만난 이 작고 여린 친구는 세상을 향한 가시를 품고 있었고, 때로는 지나치게 민감했다. 나는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더 이상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기 싫어”라는 말 속에서 두터운 외로움을 발견하곤 했다. 그가 조금씩 마음을 열 때부터 나는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면 그는 10대를 떠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숙제를 미루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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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대, 자퇴생, 동성애자란 이름은 겸을 고통으로 이끌었다. 이름이란 뭘까?(박승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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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다. 너무 어렸고 내게 갖춰진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웠다. 나는 사회가 원하는 착하고 순종적인 아이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착해질 수 없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겸은 화장실에서 피묻은 면도칼을 들고 있었다. 왼쪽 손목 동맥에 선혈이 흘렀고 세숫대야의 따뜻한 물 속에 피가 풀어졌다. 밖에서 여동생이 “오빠, 빨리 나와” 하고 외쳤다. 멍하니 앉아 허공에 공허한 시선을 보내던 그는 갑자기 유리문을 세게 쳤다. 유리 파편이 꽃잎처럼 흩어졌다. 그의 첫 번째 자살 시도였다.
어떤 이들에게 가족이란 운명적인 저주 같은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겸의 아버지는 외환위기로 일자리를 잃었다. 배움은 없지만 억척스런 생활력을 가진 어머니가 우유배달로 생계를 꾸려갔다. 물론, 부부싸움은 일상이었다. 겸은 자살을 통해 “나 힘드니까 제발 관심 가져주세요”라는 비명을 지를 정도로 예민한 아이였다.
오로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던 겸은 부산의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입시 체제에 찌들어 살기보다는 좀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도 있었고, 성적이 좋아 3년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사지선다형 교육 시스템을 교묘히 이용했다. 수업시간에 교사의 태도를 관찰하며 시험에 나올 만한 것에 밑줄을 치면 끝이었다. ‘벼락치기’의 신화…. 겸은 전교 1등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실업계 학생들은 조기 탈락자라는 열등감과 수치심 속에 살아갈 뿐이었다. 반장인 겸은 “인문계나 가지 여기는 왜 왔냐?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비아냥을 받았다. 그렇다. ‘그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겸이 본 학교는 거대한 폭력의 재생산 체계였다. 그곳에는 원시적인 신체적 폭력이 있었다. 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학생들의 뺨을 때리는 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여학생의 명찰을 꺼내준다는 말도 안 되는 구실로 가슴에 손을 대는 남자 선생님도 있었다. 제도적인 폭력은 더욱 견고했다. 자율적인 방과후 특별활동에 강제적으로 참여동의서를 받는 ‘비교육적인 일’이 교육현장의 일상이었다. 종례시간의 생활 검열은 또 얼마나 지겨웠는가. 모두가 당연시하는 폭력이었다. 그 폭력은 학생들에게 전염되고 증폭됐다. 선도부와 ‘일진’이 서로의 ‘제물’을 놓고 충돌했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왕따가 된 아이에게 겸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느 가을. 창문 밖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깼다. 점심시간의 짧은 낮잠이었다. 그는 읽고 있던 <학교를 넘어서>라는 책을 가방에 넣고 교실을 나섰다. “나 집에 간다. 안녕.” 방에 들어서자마자 깊은 잠을 잤다. 저녁 때쯤 일어나 부모님께 이렇게 말했다. “나 자퇴할 거예요.”
자퇴를 얻어내기까지 부모님과 끈질긴 싸움을 벌인 끝에, 다음해 2월 결국 겸은 부모님의 도장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 “획일적인 교육과 권위주의적인 학교 안의 모습…. 나는 길을 스스로 찾기 위해 학교를 떠난다.” 그가 생각해도 꽤 멋진 자퇴사유서였다. 그 사유서를 읽고 한참을 멍하게 있던 담임선생님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가라.” 그는 초봄의 공기를 만끽하며 도로를 마구 뛰었다. 전교 1등 김경묵이 학교를 완전히 떠난 날이었다.
“이게 사회란 말인가… 너무 두려워 무서워…”
자퇴 뒤 겸은 철저히 혼자서 생활을 꾸려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한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일도 벅찼지만, 정말 견딜 수 없던 것은 그 작은 사회의 엄격한 위계질서였다. 20분밖에 안 되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선배 아르바이트생들에게 “김경묵 점심식사 들어갑니다”라고 공손히 인사해야 했다. 무엇보다 점장이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아르바이트 11일째, 퇴근하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점장이 헉헉거리며 뛰어와 욕을 퍼부었다. “야 이 XXX야, 너 쓰레기통 정리했어, 안 했어?” 그는 옆에 있던 의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여기서 당장 나가 XXX야”라고 고함을 질렀다. 첫 아르바이트가 악몽처럼 끝났다.

△ 일러스트레이션/ 방기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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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홍보 전단지를 돌리는 아르바이트는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그러나 전단지를 돌릴 때마다 환경미화원과 노점상 아주머니의 눈치를 봐야 했다. 때로는 전단지를 다 뺏기기도 했다. 얼마 뒤에는 다른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들이 “우리 구역이니까 다른 곳에서 해”라며 윽박질렀다. 겸은 어느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경비원, 환경미화원, 노점상, 전단지 배포원들…. 그는 변기를 붙잡고 꺼이꺼이 울었다. 언젠가 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학교 밖 세상은 어떻디?” “학교보다 더하지 뭐.” 그의 쓴웃음이 기억에 남는다.
제도적으로 자퇴생을 배제하는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퇴생을 문제아로 낙인찍은 사람들의 시선, 바로 일상생활의 폭력이다. 어느 날 충동적으로 가출한 겸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친구집을 찾았다. 기분 좋게 술에 취한 친구의 아버지가 겸에게 물었다. “내 아들 학교 후배인가?” 겸은 무심코 자퇴생이라고 대답했다. “뭐? 자퇴를 했다고? 너희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 학교를 그만둬? 내 집에서 당장 나가!” 그동안 자퇴생이라는 이유로 별별 일을 다 겪었지만 그날처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무렵 겸은 학생인권운동에 몰입했다. 고1 때부터 전국중고등학생연합 부산지부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만 해도 겸은 거리에 나가 서명용지를 돌리면 바로 교육혁명이 일어나 0교시로 인해 밥을 굶는 학생들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부산 각 학교를 돌아다니며 연대를 구성하자고 선동했다. “그런데, 정말,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더라.”
2002년 12월의 겨울, 그는 혼란스러웠다. 체 게바라의 오토바이 이름을 딴 16인치 자전거 ‘테라로사’를 타고 너바나의 노래 를 들으며 밤거리를 헤맸다. 출구가 보이지 않자, 집에만 오면 “왜 이렇게 못 사냐”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무서운 할머니를 찾았다. 공장에서 화상을 입어 장애인이 된 뒤, 정부 보조금으로 연명하며 혼자 사는 할머니는 적금을 깬 돈 120만원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병원에 갈 돈을 아껴 든 적금이었다. 겸은 서서히 도망칠 준비를 했다. 평소에 그렇게 ‘씹어댔던’ 서울로. 그 비대한 도시로.
“나는 자퇴생, 혹은 학생? 나는 동성애자, 혹은 이성애자? 나는 남성 혹은 여성? 나는 청소년 혹은 성인 나는 선한 사람 혹은 악한 사람? 나는 비정상인 혹은 정상인?”
“언제 너의 성 정체성을 발견했니?” “발견했다기보다는 인정했다는 말이 옳아.” 초등학교 5학년 처음 포르노를 보았을 때 겸은 자신이 벌거벗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를 사랑했지만 애써 감정을 묻어두었다. 그는 평생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을 것이란 불안감을 견딜 수 없었다.
지난해 가을 그는 부산 남포동에서 영화 <헤드윅>을 만났다.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던 그에게 드랙퀸의 여신 헤드윅은 세상과 당당히 맞서 싸워가는 인간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그녀와 마찬가지로 세상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 페미니스트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커밍아웃을 했다. 대성공이었다. 커밍아웃은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우리는 바로 여기 있어!”라며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 전략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겸의 생각이다. 그는 서서히 커밍아웃의 범위를 넓혀갔다. 자신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4월29일 한 청소년 동성애자가 자살했다. 겸은 아르바이트를 ‘째고’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로 달려갔다. 처음 커밍아웃을 받아준 친구가 “넌 꼭 죽지 마. 약속해 알았지?”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무려 3시간의 회의를 거치며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나는 지금 죽지 못합니다.” 헤드윅은 “우리는 성적 소수자. 제우스의 번개로 내 반쪽 찾아다니는 아름다운 방랑자”라고 노래했다.
반전운동이 뜨겁던 올해 3월, 겸은 무지개 깃발 아래에 모인 동성애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어찌 보면 아우팅의 위험이 컸던 이 자리에서 그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반전집회에서 겸은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데뷔’했다. 그러나 퀴어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도 한 가지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왜 또래의 청소년 동성애자들은 만날 수 없을까. 청소년 동성애자인권학교에 참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외로워서였을까. 이즈음 그는 ‘부조리한 사랑’이라고 불렀던 가정을 가진 30대 후반의 게이를 만나 ‘문어 빨판’처럼 들러붙어 울어댔다.
“이 시스템 속에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시스템 속에 침몰해가는 정신, 그 정신으로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낙오자인가”
겸은 올해 2월 부산을 탈출해 학생인권운동을 하며 알게 된 형 자취방에 둥지를 틀었다. 아르바이트로 모든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지하철 개찰구 뛰어넘기, 하루 한끼 먹고 생활하기, 빈대붙기 등의 기술을 익혔다. 하루 세끼를 먹으면 위가 놀라서 토하기도 했다. 문화공연은 인터넷 무료 입장권에 응모하거나 돈 많은 친구에게 부탁했다(나는 그가 1천원짜리 한장으로 이틀을 나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도 미래를 위해 저축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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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레이션/ 방기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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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한 사회과학 서점의 점원일을 시작했다. 일은 간단했고 저녁을 얻어먹는 황금 기회도 잡았지만, 그의 꿈에 투자할 시간이 없었다. 그동안 따뜻하게 대해주던 주인아저씨는 그만두겠다는 말에 “그렇게 살면 인생 낙오자 돼요”라는 충고를 덧붙였다. 낙오자, 낙오자, 낙오자…. 이 말 속에서 허우적대던 어느 날 그는 몸빼에 야구 모자를 쓰고 리어카를 끌고 가던 할머니를 미행했다. 폐품을 줍던 할머니는 머리를 다듬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가진 돈을 모두 털어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사 리어카 옆에 두었다. 갑자기 가족이 떠올랐다. 다음날 그는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다시 찾은 부산에서 지겹기만 하던 가족을 좀더 부드럽게 바라볼 수 있었다. 가족이 변해서가 아니라 그의 시선이 관대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참 불행하게 살았다. 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그만 저 세상으로 가고 싶다던 아버지의 낙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성숙의 계단을 올라서고 있었다. 자주 찾던 부산시립도서관, 시네마테크, 북카페 등을 돌아보다 서울에서 줄곧 그리워하던 해운대 바다로 갔다. 부조리로 가득했던 시간들과 다음날 서울에서 할 일을 생각하는 동안 바다는 밤을 맞았다. 그는 모래 위에 집게손가락을 펴 글을 적었다. “I will survive.”
“넌 너무 예민했던 것 아닐까? 모두가 견뎌내고 있잖아.” 언젠가 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는 흔쾌히 인정하면서 지금 자신이 경계에 서 있다고 말했다. 세상을 좀더 넓게 포용할 수 있는 경계 말이다. 그는 지금 장애인을 보조하는 밤샘 아르바이트로 월 40만원을 벌면서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고 있다.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현실을 전복하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없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은 그가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프랑수아 오종 특별전을 보면서부터 키워온 것이다.
제발 겸의 이야기가 신파로 비치지 말기를 바란다. <미워도 다시 한번>에 눈물 흘리는 독재정권의 백성처럼, 신파란 약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한 태도다. 겸은 단지 이해받고 싶을 뿐이다. 겸은 내게 이성애자만큼의 동성애에 대한 이해를 요구했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겸은 당신에게도 그만큼의 이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붙여진 ‘이름’들에 대하여. 10대, 자퇴생, 동성애자라는 이름은 끊임없이 그를 고통으로 이끌었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bretolt@hani.co.kr
* 굵은 글씨의 인용문은 모두 겸의 일기에서 따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