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김경 칼럼 목록 > 칼럼내용   2003년12월17일 제489호
기쁨 두배 ‘아트 쇼핑’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명품백 쇼핑보다 저렴한 미술품 ‘투자’… 괜찮은 작품 소장하며 우쭐함 느껴

아무래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는 일은 역시 돈 쓰는 일인 것 같다. 언제 어디서나 순식간에 몰입할 수 있고,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취하지 않고도 기분이 좋아진다. 심지어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은 요란스러운 생리통도 잠시 잠잠해진다. 그런 면에서 마돈나 말대로 여자에게 가장 효능 좋은 서로피(치료법)는 역시 쇼핑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약발은 아주 잠깐 동안, 그러니까 집에 돌아와서 영수증을 보며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기 직전까지 유효하지만.


그런데 최근 그 약발이 상당히 오래가는 쇼핑 항목을 발견했는데, 다름 아닌 ‘오리지널 미술작품’이었다. 대기업 며느리도 아닌 주제에 가당치도 않게 그렇게 고상한 쇼핑을 할 수 있었던 계기는 이렇다.

얼마 전 우연히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서울국제아트페어 ‘MANIF9! 03’ 전시장을 돌아보게 됐는데, 그때 나는 생각보다 작품값이 그렇게 비싸지 않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 대표적인 팝아트 작가 짐 다인의 멋진 회화작품이 겨우(?) 300만원밖에 안 되었다. 그 밖에도 50만∼150만원대로 내 신용카드를 노리는 멋진 작품들이 정말 많았다. 전에 없이 서울아트페어에서는 미술품 구매 의욕이 높아졌는데, 그건 무엇보다 그림 아래 분명하게 가격표가 적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화랑이 제시하는 가격과 실제 거래 가격이 다른, 이중가격제가 왜 국내 미술시장의 활성화를 막는 병폐인지 몸소 느꼈다고 할까?

어쨌든 그날 이후 결심했다. 옷이나 구두 같은 자산가치 없는 물건들을 사들이느라 돈을 탕진하지 말고, 차라리 그 돈으로 한번쯤 그림을 사보자고. 게다가 이건 단순한 쇼핑이 아니라, 투자다. 미술품 투자는 주식 투자보다 안전하다고 하지 않던가? 혹시 가격이 폭락해도 적어도 작품이 주식처럼 휴지 쪼가리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역시 투자라고 생각하니 왠지 흥이 나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백화점 쇼핑하듯이 이런저런 전시장(특히 해외 온라인 갤러리)을 구경 다니며 가격을 알아봤다. 그러던 중 한 미술평론가로부터 결정적 정보를 얻게 되었으니, 그 정도 예산(100만원 전후)이라면 젊은 작가 중 꽤 지명도 있는 작가의 작품도 구입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예를 들어 이동기?” 아니, 이동기라면 미술의 ‘미’가 아름다움(美)인지 쌀(米)인지 모르는 내 골통 후배도 좋아하는 그 작가? ‘아토마우스’라고 부르는, 미키마우스와 아톰을 합성한 듯한 이동기 회화의 전속 캐릭터는 그만큼 인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내 구매 의욕을 마구 불사른 작가의 한 마디가 있었으니, 그것은 “나는 비틀즈처럼 소장되고 싶다”는 말이었다. 나는 작가의 그 솔직한 욕망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현대미술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고, 유행을 타는 패션’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히 스타성 내지는 투자 가치가 있는 작가였다.

결국 나는 요즘 꽤 잘나가는 젊은 작가의 대표작 한점을 샀다. 그건 내 소비 수준이 그만큼 고급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작품이 정말로 프라다 백 값보다 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 사봐서 모르겠지만, 명품백을 사면 과연 이런 기분이 들까? 얼마 전까지 미술관에 걸려 있던 작품을 샀다고 생각하니 마구 콧대가 높아지는 것 같다. 왠지 내가 좀더 근사한 여자가 된 것 같은 허영심이 든다. 분명한 건 그러한 착각의 약발이 옷보다 오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