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冊 에세이 ] 2003년11월06일 제483호 

어린왕자를 떠올리며/ 박남준

동화책 한권이 집에 없던 시절이었다. 학교에 가도 도서관이 있었을 리야.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에는 금세 눈에 띄는 세련된 옷차림에, 도시락 반찬이라고는 냄새나는 김치와 고리고리한 젓갈, 짜디짠 장아찌류가 전부이던 무렵 먹음직스러운 계란말이에 쇠고기자장 같은 군침이 도는 도시락 반찬을 싸오는 잘사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거의 매일 다른 동화책을 책가방에 넣어오곤 했다.

학교 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근사한 가죽 책가방이었다. 우리들 대부분이 울긋불긋한 보자기에 책을 싸서 어깨와 허리에 두르거나 보자기의 한쪽 묶음을 길게 늘여 팔짱을 하듯 책보를 끼고 다니는 게 고작이었던 가난한 날들 속에서 그 친구는 자못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그 많은 동화책을 읽기 위하여

동화책 한권을 빌려보기 위해서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친구의 책가방을 대신 들고 집에까지 간다든지 화장실 청소 당번을 대신해야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플란더스의 개>를, <엄마 찾아 삼만리>를, <소공녀>를 친구의 잔심부름을 해주며 빌려 읽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일러스트레이션 | 이우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조그만 바닷가 마을 도서관은 그 중학교에도 물론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국어선생님 집에 놀러갔다. 선생님 방에 들어갔을 때 어린 내 생애 가장 놀라운 광경을 보고 그만 입이 떡 벌어져 한동안 다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선생님의 방안에는 사방팔방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얼마든지 책을 빌려가도 좋다는 말씀을 하셨지 아마. 그러고는 내가 주로 동화책들을 고르는 것을 보고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이런 책들도 보아야 한다며 한국 단편문학전집들을 추천해주셨다. 중학생이었고 그때는 내게도 가죽 가방은 아니지만 비닐로 된 그럴 듯해 보이는 근사한 책가방이 있었으므로, 책가방에 더는 들어갈 수 없으리만큼 책을 집어넣었다.

어디 그뿐이었을까. 책가방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한 아름이나 되는 책들을 더 들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언제라도 집에 와서 책을 빌려갈 수 있으니 그렇게 무겁게 들고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아니에요. 선생님 하나도 무겁지 않아요.” 나는 가슴 벅찬 희열로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 기어코 그 많은 책들을 들고 낑낑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 잠 많던 시절 늦잠꾸러기 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기가 무섭게 책을 찾아 펼치고는 했다. 간밤 책을 보다가 쏟아지는 졸음에 깜박 잠이 들고 말았던 펼쳐진 책 위에 흘려놓은 침 자국을 보며 얼마나 가슴을 졸이기도 했던가.

그 무렵 운명처럼 나를 붙든 책이 있었다. <어린왕자>,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였다. 모자 속에 들어 있는 코끼리의 보아뱀이 나오고 바오밥나무가 나오고 투정 많은 장미가 나오고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나오는 <어린왕자>. 내 비밀을 말해줄게. 내 비밀은 아주 간단해. 만약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난 너에게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야.

아직도 그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건만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가끔 친구들에게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나를 길들여줘” “네가 오후 4시에 온다고 말해줘”라고 아이처럼 떼를 쓰고는 했다. 고향을 물어오는 이들에게 “소혹성 b612호”라고 말하며 아프지 않게 물어줄 수 있냐고 묻고는 했다. 어린왕자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는 얼마나 그 밤, 눈이 퉁퉁 붓도록 엉엉 울고 말았던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어린왕자를 생각하며, 나도 저 별들 어딘가에 있을 소혹성으로 떠나가려고 얼마나 뒷산 큰 벼랑 위에 오르고 했던가.

그래 붉은 저 해가 바다로 꼴깍 떨어지면 그때 뛰어내리는 거야. 한번도 뛰어내리지 못했다. 번번이 나는 자살에 실패했다. 내 곁에는 아프지 않게 물어줄 친구가 없었다. 거기 쓰러져 울다가 지쳐 뉘엿뉘엿 땅거미의 산길을 내려오곤 했다.

그래 내가 이 다음에 어른이 되어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다면 꼭 잊지 않아야지. 어린왕자의 감동을 잊지 않고 언젠가는 돌려줘야지. 어른이 되었다. 남루하고 가난한 시를 들고 세상 속으로 나갔다. 문득문득 어린왕자가 다가오곤 한다. 그 빚을 갚으려 짧은 동화를 세편 쓴 적이 있다. 아직 어린왕자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


박남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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