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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冊에세이 | 등록 2003.10.23(목) 제48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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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에세이] 벌거벗은 정직성/ 이남희 여든이 넘은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결혼했다는 말을 곧잘 하신다. 부유했던 외할아버지는 애지중지하던 딸을 시집보내려고 전국을 돌며 간선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조실부모하고 빈한한지라 고려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고 집으로 찾아가 만났는데 책이 한 방 가득 차 있었다, 책들 모두가 하도 읽어 너덜너덜했다. 그에 반한 외할아버지는 더 알아볼 것도 없다며 그 자리에서 정혼해버렸다는 것이다.
책은 많았지만 읽지 말라 했던 아버지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상당히 다르다. 어렸을 때부터 들은 아버지의 잔소리는 책을 읽지말라는 거였다. 눈 나빠진다, 어서 불 끄고 자라, 그렇게 책에 빠져서 현실도 모르게 되면 어떡할 거냐 등등. 그러다보니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전등으로 비추어가며 몰래 책을 읽는 경험도 하였고, 책을 사는 일은 비밀작전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 백일몽은 언제나 책으로 가득 찬 나만의 방으로 시작되곤 했었다.(물론 아버지는 늘 책이며 신문 같은 것을 읽고 있었다.) 그런 구박은 내가 어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도 계속돼 책 쇼핑을 한 날이면 부모의 눈에 띄어 한바탕 잔소리를 듣지 않도록 책 보따리를 몰래 갖고 들어가는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심리학을 약간 배운 선무당의 눈으로 보자면 아버지는 대학 공부를 중도 포기한 당신에게 심한 자괴감을 느낀 듯싶고, 그래서 자식들의 책읽기를 말려 당신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저 평범한 서민으로 살도록 강요하는 현상으로 나타난 듯싶다. 자식의 최대 라이벌은 바로 그 부모라고 했던가? 아마도 나는 반발 때문에 더욱 책에 심취하게 되었고, 결국 독서가 직업이자 오락이자 휴식인 조금은 불쌍한 인생길로 접어든 것 같다. 이처럼 말로 하는 훈육이란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어른들은 잔소리하고 강요해야 비로소 뭘 좀 가르쳤다고 뿌듯해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효과가 없는 것이다. 입만 열면 정직하게 살라고 잔소리하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할머니에게 전화 오면 엄마 없다고 해” 한다면 그 아이는 결코 정직하지 못할 것이다. 요즘 출판계는 심각한 불황이라고 한다. 책이 1만부 정도만 나가도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평균 판매량이 줄었다고 한다. 만나기만 하면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숨들을 내쉰다. 그래도 틈새는 있는데, 바로 아동도서 시장인 모양이다. 출판사마다 이동용 책 시리즈가 생기고, 아동용 책 필자를 구하느라 부심하는 눈치다. 부모들은 책을 안 읽지만, 자식들은 책을 읽히겠다고 지갑을 털다 못해 카드까지 긁는다는 것이다. 어느 집이든 거실엔 책이 없어도 아이 방엔 책들이 죽 꽂힌 책장이 있다. 화려한 장정의 전집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만져보면 먼지가 묻어나고 펼쳐본 흔적은 드물다. 아이는 방에서 앉아 책을 읽는 대신 컴퓨터와 털레비전이 있는 거실에 나와 놀거나 뭘 배운다고 바쁘게 나돌고 있다. 철학교수 남편을 둔 친지 한분이 있는데 종종 재미있는 일화로 우리를 즐겁게 한다. 어느 날, 그 남편이 중학생인 아들에게 장래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더니 철학자가 되겠다는 대답을 해서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유였다. 아들은 꽤나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난 별달리 재주도 없고요, 개성도 없어서요, 그게 나한테 제일 맞을 거 같아요.” 모두들 배를 잡고 웃었다. 이래서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어른들이 늘 잊고 지내는 것
몸으로 보여주지 않는 훈육이란 아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바로 그 ‘잔소리’에 지나지 않는 게다. 독서의 장점은 누구나 안다. 인과론에 따른 논리적 사고가 깊어진다. 감정이입의 능력을 키워주어 감성적 사고를 가능케 한다, 어휘력을 늘려주어 지능지수를 높인다 등등.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댈 수 없을 정도다. 또 하나, 정서불안에다 산만한 아이를 위해 텔레비전을 치우고 책을 읽어주었더니 안정된 태도를 되찾았다는 것은 가장 최근에 들은 독서의 이익이다. 어쨌든 자식에게 책을 읽히려면 부모가 책 읽는 수밖에 없다. 이것도 다 아는 이야기인가? 아이들은 벌거벗은 정직성으로 보고 배운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걸 늘 잊고 있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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