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섭의 색정만가 | 몸의 행복
몸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행복의 조건들… 지금 당신의 몸은 제대로 자리잡고 있는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행복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처럼 보인다. 행복에 대한 요구조차 없는 삶에서 우리는 당연히 불행을 모르며 산다. 아니면 모두가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행복을 바라지 않거나 행복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행복에 대해 알고 싶어 하기 전에 행복의 형식만을 갈구하며 그 안에서 자족하거나 스스로를 모멸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요구하기 전에 눈 앞에 전시되는 온갖 행복의 도구들을 사들이면서 자신의 몸 안을 위선으로 채워 나간다.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행복의 형식에 빠져 지내는 사람들
어른이 되어 행복을 요구하기 힘든 세태 속에서 살면서 우리는 가장 뛰어난 행복의 조건은 이미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리고 화들짝 놀랐던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 놀라움 뒤로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고 믿는 것과 동시에 이미 규정돼 있는 조건들을 제각각 하나의 목록표로 만들게 마련이다. 그리곤 그 목록표에 따라 하나둘씩 사들이고 목록에서 지워가면서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한다. 차마 행복하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리곤 이 조건들을 쏟아지는 광고 안에서 차곡차곡 챙기며 산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행복에 대해 조금씩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목록표 위의 물건들이 생활의 기쁨을 주거나 편리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행복을 준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물건을 통해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다. 광고 안에서 우리는 내 몸과 맞지 않는 행복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상품을 알리고 팔기 위해 시작된 광고가 이제는 위장된 의미를 팔거나 거래시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가짜임을 알면서도 광고를 통해 소개되는 그 많은 조건들을 행복과 결부시키지 않는 사람 또한 없다. 그 광고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자신을 쳐다보게 된다. 채워지지 않는 행복의 조건들을 따져가면서 매일 우리는 그렇게 허물어져 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몸은 허물어져 가는 내 자신의 계측기 역할을 한다.
행복은 밖으로 드러나는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분 좋은 것, 정중한 것, 친절과 관대 등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는 나와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하거나 정중하다거나 친절하다고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이처럼 행복은 드러나고 표현될 때 참될 수 있다. 이 참된 행복의 외형적 조건은 내 몸에서 시작된다. 내 정신과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할지라도 몸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한, 그것은 참된 행복이 아닌 것이다. 또한 남의 몸으로부터 확인되는 행복도 참된 것이 아니다. 무리지어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의 괴성은 그 괴성 때문에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것이지, 연예인의 몸놀림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행복의 참모습이 아니다.
 |

△ 〈수정할까요 #22〉(염중호 작, 2003)
|
몸을 소진해 행복의 조건을 채울 건가
그러나 우리는 행복을 표현하는 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광고 안에서 행복으로 조건 지워진 몸을 통해서만 행복을 실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번쩍거리는 다이아반지 광고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해내곤 행복한 미소를 겨우 짓는다. 그들은 큰 차의 문을 열어주는 정중한 태도의 도어맨을 보면서 그 차를 타고 있을 자신의 몸에 대해 생각해보곤 행복의 실감을 계측한다. 몸을 소비시키는 이런 행복의 조건들은 이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얄팍하고 천박한 자본의 문제가 아니다. 몸을 소진시켜서라도 행복의 조건들을 하나씩 소비시켜 비현실 세계로 편입되고자 하는 우리의 행복에 대한 과잉의식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과잉된 의식을 몸으로 드러내려 하는 그 모멸의 조건을, 우리는 스스로 성취나 성공의 잣대로 환원시켜 과장된 몸짓으로 나와 너를 설득하려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몸의 현실이다.
장애 있는 몸이 결코 행복을 위장하는 광고에서 조건 지워진 행복으로 표현되지 않듯이, 우리는 이미 결정된 몸의 어떤 상태를 행복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결정을 확인시켜주는 광고 안의 가짜 몸들에 대해 열광한다. 당연히 우리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확인되는 행복을 모르며 지낸다. 그렇기에 기분이 좋은 것도, 정중한 것도, 친절한 것도 내 몸에서 시작되기보다는 남의 몸에서 드러나는 것을 자신의 몸이 볼 때서야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 몸은 소비의 천국으로서 존재하면 그만이다. 이제 내 몸은 내 행복을 위한 광고의 한 단면이면 족하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제 몸이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모두 제 몸의 불행을 알고 있듯이 몸의 행복도 알고 있다. 우리는 그 행복의 실천방법들이 생활 속에 자리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낡은 유행처럼 느끼거나 웬만해서 동의하지는 않지만, 성실함과 몸의 관계를 부정하지 못한다. 성실한 삶의 목표는 행복한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사이에 몸은 굳건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우리는 삶의 목표를 잃지도 않거니와 생활 속의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이 언제부턴가 그 자리에서 도망쳐 광고 안에서만 존재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삶의 목표를 잃거나 생활의 행복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었다. 탄력 있는 여성의 가슴을 광고하면서 우리는 아이 둘을 낳아 축 늘어진 마누라의 젖가슴을 원망하게 되었다. 탄력 있는 카메라의 앵글을 모른 채 우리는 과장된 앵글이 잡아 낸 인테리어로 제 삶을 지켜내는 내 집안을 심드렁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군대에 가고야 말겠다는 건실한 청년을 우리는 광고에서 발견하곤, 성실함조차 떨어져 나가는 내 몸의 부재감을 알게 되었다.
자기 최면에 걸린 몸을 풀어라
행복은 생명과 같아, 내 몸과 하나다. 그 하나인 몸의 부재를 우리는 광고 속의 가짜 몸들이 만들어내는 죽음들로 확인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현재 이 죽음들을 바라보면서 죽은 내 몸에 대한 이해를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도적으로 우리는 그걸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바라보면서 실감하게 된,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는(내 몸으로 표현하기 힘든) 내 몸에 대한 원망은 광고를 보면 깨끗하게 사라진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리곤 내 몸을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가 행복을 광고의 유혹처럼 모두 돈 주고 사다, 내 죽은 몸 어디에라도 척척 붙일 수 있다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 최면이 이제는 우리 몸의 행복이 되었다. 그리고 진짜 내 몸은 부재 중이다.
이섭 |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 ‘이섭의 색정만가’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