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발을 꾸며야 맵시 난다고? 성적 환상에 사로잡혀 편안한 발은 뒷전… 가학적 방법으로 여성의 발 학대하기도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한 감사를 쉬 잊고 산다. 언제라도 벌떡 일어나 제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것은 튼튼하고 건강한 발과 다리가 있어서다. 하지만 우리는 발과 다리의 멀쩡함에 어떤 감격도 하지 않는다.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마는 신체 부위들은 하나둘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발은 그 ‘있음’에 대해 감사는커녕 홀대를 받아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서 발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커져가고 있다. 발마사지를 통해 건강을 지키라는 광고 문구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발에 무슨 약을 바른 뒤 자고 나면 몸에 누적된 나쁜 기운들이 쏙 빠져 나온다고까지 한다. ‘믿거나 말거나’ 식이지만 발에 대한 관심은 드디어 건강과 다이어트에 따른 열풍에 맞추어 관심의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저기 발바닥을 자극하는 기능성 산보 구역을 만들어놓기도 하고 산행 중에 맨발로 걸으면서 발바닥을 자극하는 일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발에 대해 이제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기울인다. 언제나 건강을 위해서지만.
홀대받던 발이 건강 위해 대접받아
발에 대한 편견은 문화권에 따라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왔다. 가장 심각한 편견은 아마도 옛 중국의 전족 관습일 것이다. 여성의 발을 인위적이고 가학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기형으로 만들고는 남성의 입장에서 그 모양새를 통해 성적 흥분을 즐겼다고 하니 여성의 발은 가히 엽기 수준으로 혹사당했던 것이다. 성적 대상으로서 작고 맵시 있는 여성의 발에 대한 선호는 우리나라에서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 옛날에는 버선으로 발을 꽉 조여 모양새를 냈다면 요즈음에는 굽 높은 여성전용 신발로 발 모양을 만들어낸다. 아무리 그런 구두가 발 건강에 좋지 않고 신체를 불균형하게 만들어 각종 질환을 일으킨다고 경고해도 하이힐은 여성의 발을 가장 ‘여성답게’ 만드는 외부적 장치로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처럼 발에 대한 편견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적 징후를 확대하는 데 사용되거나 노동과 유리된 삶의 외형적 특징으로부터 기인한다.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발은 편안해야 하고 튼튼하게 무장되어야 한다. 정신을 신체보다 많이 사용해야 하는 직업군에서는 가능한 한 맨발로 일하는 편이 신발을 신고 일하는 것보다 집중력도 높고 머리 회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걸어야 하는 사람은 발의 보호에 신경을 쓰게 마련인데 이때 맵시는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니다. ‘발을 쭉 뻗고 잔다’라는 표현이 있다. 온몸이 편안한 상태이고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넌지시 암시하는 표현이다. 우리는 발을 쭉 뻗고 얻는 편안함만큼 발에 대한 편견을 쭉 털어내야 한다. 발에 덧씌워진 허접한 상상력들을 거두어들여서 제 몸의 기능대로 있도록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아니면 발등에 제 갖고 싶은 상표를 문신으로 새겨야 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계급 드러낸 신발… 발 치장의 성적 대상화
우리는 발의 기능과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고안된 신발을 선택하게 된다. 보통 신발은 발을 보호하고 발의 기능을 향상시키도록 발달되어 왔는데 유독 계급을 드러낼 목적으로 디자인된 신발만은 예외로 만들어지고 있다. 우선 신발로부터 계급의 차이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가장 약하고 쉽게 손상되는 재료를 선택한다. 얇은 가죽을 밑창으로 사용한다든지 가는 끈을 달아 발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특별히(?) 고안되어 있다. 이런 발상은 일하지 않는 계급의 특징을 연상하도록 한다. 발품을 팔 이유가 없고 거친 환경에 발이나 신이 노출될 일이 없으니 신발 자체가 튼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편안한 발보다는 맵시에 치중하는 발을 위해 신발을 맞추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맨발은 안 된다. 날것으로 드러내는 일은 복잡한 예의범절 안에서 자신들의 규격화를 유지해야 하는 계급에 익숙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용납하기도 힘든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 환상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현실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는데, 계급 상승을 꿈꾸는 물신의 세계에서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 꿈을 팔려고 하는 사람들은 젊고 유능하며 가능성이 무수히 많은 여성들을 일차 대상으로 삼아 맹렬하게 유혹한다. 남성들에게 이 꿈을 대대적으로 팔지 않는 이유는 남성들이 계급 상승에 대한 단호한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광고에서조차) 이미 계급의 주체라고 자의 반 타의 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과 결부된 순기능을 가지는 신발에 대한 기억은 이제 고무신에 국한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발에 대한 성적 환상을 제 각각 가지고 산다. 또는 발에 얽힌 성적 환상을 제 몸에 꼭 숨겨놓고 살기도 한다. 발이 직접적인 성적 대상이 되어서가 아니라(물론 발에 집착하는 성적 환상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발로부터 연유하는 성적 환상의 농도가 짙어서 그렇다. 성적 환상은 항상 성적 대상이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발처럼 성적 대상을 비켜 가는 경우에도 우리의 상상력을 작동시키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리는 발에 대해 왜 성적 환상을 가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발 치장을 하는 우리의 심리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모든 몸치장은 제 몸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어떤 치장도 도덕적으로 우려할 만한 현상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간혹 몸을 치장하는 행위 안에 우리는 성적 대상화가 숨겨져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마치 붉은 입술을 더 붉게 보이게 하기 위한 화장법처럼 말이다.
노숙자의 발과 치장한 발, 그 구별된 신체
우리는 여름이 되면 발톱에 예쁜 색을 칠하는 무수한 여성들을 보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발목에 가늘고 귀여운 발찌를 하는 게 유행이 되기도 했다. 이런 발 치장은 우선 발을 날것으로 드러내야 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연출되게 마련인데, 이런 경우에는 날씨 탓도 있겠거니와 양말이나 스타킹을 벗어야 하는 옷차림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몸을 일정 정도 노출시키면서 자연스러운 전체 맵시를 고려하여 맨발을 드러내야 하고 이때 발을 치장함으로써 맵시가 완성된다. 또 한 가지의 경우는 몸의 노출과 관계없이 그냥 맨발을 드러내는 경우인데 이때 발치장이 확연히 드러나는 신발을 선택하게 된다. 단순한 맨발이 아닌 맨발을 치장하는 다양한 선택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구체적인 성적 징후들을 좀더 확연하게 만드는 것이다. 노숙자의 때에 전 맨발과 한껏 멋부린 맨발이 선택한 다양한 장식은 그 두 맨발의 먼 거리 사이에 촘촘하게 계급과 계층을 나누게 하고 성적 환상을 구별하여 결정하게 한다. 우리는 이미 가꾸어진 신체에 대한 움츠릴 수 없는 성적 환상에 시달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섭 |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