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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이섭의 색정만가 등록 2003.02.13(목) 제446호

[이섭의 색정만가] 들어라, 살들의 외침을!

[다이어트]

날씬한 몸매 강요당하며 제거의 대상으로 몰려… 욕망을 자극하는 각종 약물의 노예로 전락

몸의 살을 빼라!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구호 가운데 하나가 돼버린 ‘살빼기’는 초등학교 어린이에게까지 몸의 부피에 대해 무거운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날씬한 몸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풍조는 뚜렷한 근원도 없이 사람을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이 돼버렸다. 모든 매체들은 다투어 어떻게 살을 뺄 수 있는지 알려주면서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동네 어귀에서도 ‘파워-워킹’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으름을 버리지 않고도 살 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누가 권하기 전에 새로운 ‘약발’에 몸을 던지는 데 익숙하다. 음식을 적게 먹거나 아예 거부해 몸으로부터 살을 떼어내려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심한 예는(이 경우는 비만이 사실상 개인의 병력으로 인정될 때 가능한 선택처럼 보이는데) 아예 몸을 열고 살의 일정부분을 덜어내는 일을 기꺼이 선택하는 경우다. 살을 몸에서 제거하는 일은 이제 아름다운 행위가 되었다!

살을 제거하는 아름다운 행위

무진장한 살을 빼는 데 성공한 몇 사람들은 그들이 보여준 인고의 노력과 더불어 성실함으로 여겨지는 생활의 태도 때문에 우리 사회의 새로운 표상이 된다. 그들의 성공담(?)은 우물가 처녀들 속삭임처럼 바람을 타고 전국을 떠돌아 너나 할 것 없이 그들 방식의 몸단련을 유행시키기도 한다. 그들은 가혹한 자기 절제를 통해 몸을 다듬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몸은 그런 전제 때문에 아름답다. 하지만 그들의 몸 가꾸기가 한 개인의 성공담으로까지 이야기돼도 좋을까 ‘먼저 감각 속에 없던 것은 지성 안에도 없다’는 오래된 격언이 다이어트 비법처럼 소개되는 모든 광고나 요술행위에 준하는 다이어트 요법들 위로 겹쳐진다. 생각 있는 많은 사람들이 경고한 ‘몸과 정신’의 균형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생각하는 힘’도 마비시키는 감각의 절대 믿음은 신뢰할 수 없다. 또한 느낌을 거부하거나 감각으로 이해되는 세계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어떤 지적 판단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런데 다이어트와 관련돼서 우리가 우리의 몸을 못살게 구는 모든 행위들은 양 극단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음식을 적게 먹는 습관은 포식과 걸식증에 걸린 현대인의 생활에서 매우 유효한 자기 건강관리법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너무 많이 먹고 있다. 하지만 소식과 절식이 너덜거리는 몸을 추스르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빼어난 몸의 형태를 위해 취하는 극단적 요법이라면 우리는 이 결정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지는 않는지 물어볼 일이 된다. 대체로 소식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생활의 태도 또한 검박하고 정신적으로도 소박하다. 자본의 홍수에서 유연하게 몸을 빼낼 줄 알고 자연스러운 섭생의 원리를 실천하는 데 몸으로 마술과 같은 하루를 즐기는 공통점 또한 그들은 가지고 있다. 당연히 그들이 섭취하는 적은 양의 음식이란 그들의 정신과 지성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균형’의 한 부분이다.

건강을 유지하는 몸을 만들어야

육류의 섭취를 줄이고 채식 중심의 식단으로 몸을 가꾸려는 사람들도 있다. 좀더 극단적인 경우는 선식 또는 생식 등의 방식이나 특정한 ‘차’를 하루에도 열두어잔씩 마시는 방법으로 먹는 ‘것’을 임의로 규정해 몸을 가꾸려는 경우다. 이런 ‘음식 가려먹기’ 방식은 혀 끝에선 달지만 몸에 해로운 음식들- 이런 음식들은 대체로 거대한 자본의 생식력과 맞물려 있게 마련이다- 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된 현대에서 자기방어적 성격을 지니기에 적절한 치유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특이한 ‘음식 가리기’ 방법으로 몸의 선을 유지하려는 조급함은 익히 알고 있듯 매끼마다 고기만을 먹는다는 ‘실패한 황제’ 다이어트법에서도 알 수 있듯 자기가 만든 허방에 스스로 기어드는 꼴이 된다. 지나친 육류소비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최근의 현상들이 지나치고 도를 넘어서는 바람에 이제 과도한 고기음식의 소비는 낭비를 전제로 환경을 위협하고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기에 이르렀다. 꼭 몸에 좋아서라기보다, 꼭 예쁜 몸을 만들어주어서라기보다 깨진 자연의 균형을 찾아내고 지키기 위해 육류소비의 폐해를 줄이는 것은 지나침 없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특정 음식에 대한 맹신은 늘 새로운 ‘균형의 상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다이어트는 양과 종류뿐 아니라 우리가 가지는 맹신에까지 아울러 적용돼야 한다.

최고의 다이어트 방법은 운동이다. 유산소 운동을 통해 체내 노폐물을 없애고 소모되는 열량을 높여 불필요한 지방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한 몸을 지키기 위해, 또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적당한 운동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정기적인 운동과 운동량으로 몸을 다지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를 우리는 스스로 쳐다보고 새삼 놀란다. 왜냐하면 권고하는 적당량의 운동이 이미 적당량 이상인 경우가 많아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적당’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운동 결과가 처진 엉덩이 선을 올리기 위해 어떤 운동이 좋으며 어떤 자세를 유지하면서 한번에 몇 회를 지속하라는 충고를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장딴지 살을 줄이기 위해 의자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가벼운 운동법까지 각종 도해를 통해 알려주는 친절은 이제 더 이상 운동으로 건강을 지키기보다는 기꺼이 내 몸을 부분부분 성형하는 꼴이 되게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건강한 몸이란 예쁜 종아리 선이나 잘룩한 허리 선과 별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운동으로 다진 몸매를 최고의 건강한 몸으로 쳐주는 데 그리 인색하지 않다. 외형적으로 그것은 처진 아랫배나 투실한 허릿살보다 균형이 잡혀 보이기 때문이다.

섣부른 환상에 기댄 욕망을 지워내자

우리가 살면서 균형감각을 쉽게 잃어버리는 경우 가운데 ‘약’에 대한 기대와 확신 그리고 맹신은 사뭇 심각성이 크다. 오죽하면 ‘약 좋다 남용 말고 약 모르고 오용 말자’고 했겠는가. 하지만 절대로 지켜지지 않는 ‘약’에 대한 오용과 남용은 비아그라를 먹으면 쉼없이 끝없이 자지가 성하여 섹스의 피스톤 행위가 그치질 않는 줄 착각하듯 온갖 특효약을 먹으면 저절로 살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줄로 우리를 착각의 늪에 빠뜨린다. 그래서 다이어트와 관련된 신약을 보면 우리는 혹 의심쩍더라도 손해보는 셈치고 날름 약을 입안에 털어넣고는 냉큼 저울 위로 올라간다. 각종 약 속으로 던져지는 욕망은 살이 빠져 보기 좋은 몸매를 꿈꾸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몸의 느낌을 우선하지 않고 지식으로만 판단하는 섣부른 환상-가짜의 세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그 욕망을 몸에서 지워내지 못한다. 살빠지는 꿈은 그래서 내 몸과 내 생활에서 꿋꿋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섭 ㅣ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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