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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이섭의 색정만가 등록 2002.09.11(수) 제426호

[이섭의 색정만가] 성기의 욕망을 자극한다

품새 유지하는 팬티 속의 진실과 거짓… 감춰진 편견으로 성희적 기능에 충실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 잘 알겠지만- 품새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러니까 폼을 제대로 잡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 품새가 정확해야지 다음 동작이 매끄럽고 또한 몸의 균형을 잃지 않음으로써 연속 동작이 가능하게 된다. ‘품새가 멋있다’는 것은 곧 외형이 멋스러운 것을 뜻한다. 이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것은 품새 안으로 감춰져 드러나지 않는 ‘진짜-몸’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결국 품새 안의 몸이 갈고 닦여져 품새를 드러내니 몸 없는 품새는 이미 품새가 아니다.

드러나지 않는 몸의 세련미 강조

외모에 치중하는 요즘 세태에서 몸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드러나는 가짜로서 몸이고, 다른 하나는 감추어져 있는 본질의 기능을 잃은 또 하나의 가짜 몸이다. 하지만 두 ‘가짜-몸’은 품새로 교정되고 품새로 드러남으로써 화해한다. 단련이나 세련과는 이미 거리가 먼, 이 몸의 상실은 ‘건강’을 빙자한 거대한 장사 잇속에 파묻혀 새로운 의미의 몸으로 탄생한다. 체중을 줄여 날씬한 ‘몸’을 만들고 나면 결혼 10년 만에 남편으로부터 다시 사랑을 확인받을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다고 다이어트 광고는 자신 있게 말한다. 이는 드러나는 품새를 교정함으로써 얻어지는 몸이 몸의 건강에 머물지 않고, 여성(남성)의 신체가 가지는 성희적 영역까지 동시에 적용된다고 믿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대신한 경우다.

한때 우리 나라의 대통령이던 어떤 분은 아랫배가 나온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지 않음으로써 무능하다고 하면서 줄기차게 뛰어다니기를 즐겼다. 이는 곧 품새가 건강을 넘어 개인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는 지표로 쓰이는 경우라 하겠다. 그런데 품새 다듬기에서 적용되는 기준은 젊음이 유지하는 몸에 치중되어 있다. 그래서 젊음을 기준 삼아 건강하거나 아니면 건강하게 다듬은 몸은 반대로 나이가 들어 쭈글쭈글하거나 나잇살이 자연스러운 몸의 꼴을 참지 못하게 하는 잣대가 되어버린다.

욕망의 장소로서 몸은 매우 한정적이다. 그렇다고 몸을 떠난 욕망이 정신적 영역이라거나 또는 영혼과 관계지어 설명하려는 고상한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는 없다. 이 욕망에 대한 미묘한 긴장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만하는 것이 바로 품새 안에 갇혀 왜곡된 몸을 살뜰히 거둬들이는 사회적 편견일 것이다. 우리는 편견을 즐기거나 최소한 방치한다. 그래서 ‘진짜-몸’은 품새 밖으로 찌그러져 드러난다.

품새를 위한 여러 방편들은 남성을 더 남성답게 만들거나 여성을 더 여성적인 사회적 위치에 고정시키는 데 골몰한다. 남성의 정력을 높이는 팬티 광고는- 우리는 왜 팬티를 통해 정력을 지속적으로 높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결국 팬티 속에 가둔 보잘 것 없는 자지(하지만 진짜인)가 ‘거대한 물건’으로 거듭나는 단련방법을 상세하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그것은 근육질의 몸과 임금왕 자가 새겨지는 아랫배와 함께 남성의 성행위에서 매우 적절하고 유용한 품새를 완성하는 데 중요하다고 믿게 만든다. 반면 여성의 팬티는 최소한 몸을 보정해 드러나는 품새에 완벽성을 지켜주는 일종의 약속처럼 광고한다. 아니 우리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광고되기 전에 그렇게 몸에 대해 스스로 욕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욕망하는 몸을 꿈꾸는 광고들

처진 엉덩이를 받쳐주거나 처진 배를 꽉 조여주는 속옷은 기능성 속옷이라고 해 ‘아줌마’를 더 이상 아줌마의 품새로 놔두지 않는다고 자신한다. 정력을 키워 성생활을 윤택(?)하게 하라는 과잉친절과 처진 엉덩이를 올려준다고 하는(그러나 실제로는 올라가지 않는) 거짓은, 결국 팬티 속의 진짜 몸을 자연스러운 꼴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품새는 이제 몸의 세련과 관계없이 화려한 동작을 연속적으로 소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색정은 삶의 에너지다. 성욕은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생동하는 에너지다. 그 욕망은 당연히 몸에 기인하는 바 크다. 특히 성기에 의존하는 바 크다. 팬티 속의 몸은 그래서 꼭 젊어야 한다거나 품새가 어떠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우리가 생동하는 에너지를 의존할 만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에너지를 누구와 더불어 쓸지 고르거나 판단하는 것은 제각각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삶의 근원적 에너지로서 성욕은 쉽게 누구와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쾌락의 도구여도 무방하지만 그 에너지의 쓰임이 늘 도락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나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에 적절하고 정확하게 쓰여야 할 진짜 몸(성기)은 단순하게 하나의 잣대로 그 품새가 규정될 수 없다. 당연히 기능성 속옷으로 무엇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옥팬티가 정력을 키워주든 말든, 망사팬티가 섹시하든 말든 그 속의 진짜 몸과는 진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말이다. 더구나 그렇게 키워진 성기 끝에 달린 색정은 이미 에너지가 아니다.

우리는 성기(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남자는 자신의 자지(몸)에 대해 편견이 있으며, 여자는 자신의 보지(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당연히 남자는 여자의 성기에 대해 무지하고, 여자는 남자의 성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앎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사물로부터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상상하거나 연상하려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상상과 연상이 욕망을 지속시키고 결국 우리는 은유와 환유라는 제법 세련된 방식을 통해 사물로부터 신화를 만들기도 한다.

속옷이 아니라 성애의 일차적 도구

또한 같은 방식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재구성해 무엇을 반성해야 할지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스스로 알게 된다. 그러나 남자의 자지와 여자의 보지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익히 아는 그 대상을 애써 감춤으로써 시작된다. 따라서 연상이나 상상을 통해 성기 자체를 충분히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색정적인 대상으로 삼아 성희적 기능만을 부여한다. 그래서 팬티는 단순하게 속옷이 아니라 성애의 일차적인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진짜 몸으로서 자지와 보지는 ‘가짜’로서 하나의 역할만을 되풀이하도록 강요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단 하나의 역할을 지지한다. 그리고 거짓과 진실이 섞인 팬티 안으로 쏙 집어넣고는 잊어버리고 만다.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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