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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김장호의 환상박물관 등록 2002.08.08(목) 제421호

[김장호의 환상박물관 추억을 나르는 엽서들

[관광엽서]

여행지의 기억을 재생하는 낯익은 풍경… 명승지에서 이국정서, 음식, 섹스까지

“살아가는 것은 여행하는 것”이란 말도 있지만 나는 운명처럼 여행을 좋아한다.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하고 표까지 예약했는데 덜컥 감기몸살에 걸리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 대부분 여행일정을 취소하게 마련이지만 나는 여행을 강행해 열차나 고속버스에 올라탄다. 그러면 언제 아팠느냐 싶게 즉시 몸이 낫는다. 여행은 내 삶의 치유행위인지 모른다.

여행을 하면 색다른 풍경과 마주친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익숙한 풍경이 더 이상 아니다. 그러면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누른다. 우리 뇌에는 기억과 재현의 한계가 있는지라 나중에 두고두고 보려는 심사에서다. 그러나 카메라 솜씨가 어연간하지 않으면 의도한 대로 멋진 풍경을 제대로 담기가 힘들다. 그래서 사진찍기에 자신이 없는 나는 엽서를 고른다.

>>>명승지

영국 스코틀랜드에는 네스호를 비롯한 아름다운 호수가 많다.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운 고성의 풍경은 온갖 상상력을 발동한다. 용감한 기사, 아름다운 공주, 마녀, 불뿜는 용…. 호수와 성이 내려다보이는 숙소에서 하룻밤 자는 이들은 꿈에서 영화를 한편씩 찍는다. 깨어나서 못 보던 손수건이나 이상한 물건이 주변에 있으면 다시 꿈에 젖는다.

말레이시아 열대를 그린 엽서는 또 어떤가. 각종 독충과 맹수는 찾아볼 수 없고 물소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곳은 분명 40℃를 웃돌 것인데도 시원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열대 여인이 은근한 웃음과 함께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관광엽서의 자연은 이렇게 온순하다. 태풍과 비바람을 동반하는 ‘자연’스러움이 아니다. 이제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레저타운의 뒷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내 손에 있는 금강산 엽서를 누구에게 넘겨받았는지,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이 엽서는 국적불명(?)이다. 금강산에서 구입한 북한 엽서인지 그냥 남한에서 굴러다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인쇄상태나 종이재질을 흠잡아 북한 것이 아니겠느냐고도 해보지만 엽서 뒷면에는 단지 ‘KOREA’라는 문구밖에 없다. 그렇다. 금강산은 코리아의 풍경이다.

>>>고적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일본 가마쿠라 신사, 그리고 창덕궁. 다들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자료사진 같다. 현존하는 건물들이지만 현대인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단지 문화재이고 가끔 이곳에서 종교의식을 하고, 문화행사도 벌인다는 것뿐이다. 그것들은 결국 르네상스 이탈리아인, 사무라이, 조선 왕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결국 지금은 살아 있는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상징물

어떤 엽서를 고를까 망설이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충고한다. 먼저 엽서 보낼 대상을 직장 상사나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소식을 전하고 싶은 사람 등의 ‘공식적인’ 관계와 아내나 애인, 부모형제, 헤어졌지만 이번 기회를 빌려 화해하고 싶은 사람 등의 ‘정분 있는’ 관계로 나누라고 권한다. 그러고 나서 공식적 관계용 발송엽서로는 무엇보다 자기가 지금 어느 나라에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풍경이 담긴 엽서를 고르라고 말한다. 그냥 안부만 전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내 생각에서다.

하지만 그 나라의 기념물이 담긴 엽서는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머라이언(사자물고기?)은 다름이 아닌 ‘바다’와 ‘중국’이며, 영국 런던의 국회의사당은 ‘의회제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서울의 상징물인 광화문이나 경복궁, 63빌딩은 그래서 답답하고 우울하고 짜증난다.

>>>이국정서

풍경은 자연이나 건축물이 아닌 인간이 빚어내기도 한다. 예전의 여행은 그냥 쉬러 가거나 편안히 즐길 수 있는 풍경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식민지시대 유럽인들은 새로운 여행 풍경을 만들었다. 이국정서라고 표현하는 단어가 그것인데,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문명의 권태에 자극을 주고자 하는 의도였다. 유럽인들은 말레이시아의 뱀사원, 아프리카의 민속의식을 찡그린 표정으로 유심히 보면서 온몸의 짜릿함을 만끽한다. 그들 안에 깊숙이 숨은 야만성에 전율을 금치 못한다.

>>>토속음식

이탈리아에서 피자, 인도에서 카레, 일본에서 생선회를 먹는 행위는 어리석은 짓이다. 물론 원조의 맛을 충분히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예외겠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어, 이거 아닌데”라며 손사래를 친다. 요리의 세계화가 낳은 해프닝이다.

여행의 즐거움 한 가지는 그곳 아니면 먹지 못할, 아니 그곳이라서 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이다. 똑같은 포도주라도 프랑스에서 프랑스 음식과 함께하는 맛이 다르듯 ‘풍경과 요리의 조화’는 지상에서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이다.

그리스 미코노스섬의 식당가 전경. 엽서에서 보이는 테이블의 한 자리에서 그녀와 함께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달, 넘치는 파도, 갈매기의 날갯짓을 보며 풍경을 먹었다.

>>>섹스

현대 여행은 어떤 형식으로든 섹스와 관련이 있다. 다국적 남성들의 동남아행 같은 노골적인 것말고도 신혼여행은 분위기 좋은 곳을 찾아 즐기자는 ‘섹스관광’의 일종이 아닐는지. 젊은 남녀들은 여행하면서 평생 추억에 남을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그 일이 이루어지길 꿈꾼다. 프랑스 니스에서 산 ‘어제’와 ‘오늘’이란 프랑스어가 적힌 엽서는 이를 드러내놓고 말한다. 그리스 엽서 속의 신 사티로스는 아마 현대 섹스관광의 수호신이 아닐까.

도상학 연구가 alha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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