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댁 사는 이야기 ] 2003년10월23일 제481호 

가실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잦았던 것치곤 나락 베기 좋은 날이다. 벼베기철이면 마음 바빠진 아버님은 품앗이 일꾼 구하느라 애가 탄다. 올해는 시동생도 못 내려오는지 소식 없고 젖소 키우는 아들 친구에게 어렵게 부탁 넣어보았지만 젖소 겨울 양식인 볏짚 2만평 작업을 우리집 일과 꼭 같게 맞춰놓았노라며 미안해 죽는다.

서로 미안하고 섭한 마음 감추려고 서둘러 동네 아저씨(도시에선 할아버지 축에 드는 60~70대) 서너명 놉(일꾼) 얻어놓고야 아버님 마음이 놓이나 보다. 때마침 휴일이고 올 가실(벼베기)할 때는 볏짚의 구수한 냄새 실컷 맡고 일손도 거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터라 읍내서 튀겨온 통닭과 맥주 사들고 누런 논으로 달려가니 기계소리에 귀가 멍하다.


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서너해 전만 해도 콤바인 옆구리에서 포대가 나락으로 차올라오면 조수가 지퍼 잠그고 등짐하기 좋은 곳에 톡톡 떨구어놓곤 했다. 40kg 정도의 쌀가마 등짐으로 실어 나르는 일이 몸고생은 되었지만 콤바인 포대 줄어드는 재미와 한가로운 가을바람에 땀 식힘 했던 기억이 아쉽게 남아 있다. 요즘 콤바인은 차체에 나락을 저장했다가 꽉 차면 운반할 차나 경운기에 부어주게 되어 있어서 콤바인 포대와 조수가 필요 없고 일손도 많이 줄었다.

기계소리에 잡아 먹힌 논에서 마땅히 할 일 못 찾아 집으로 오니 하우스와 마당에 하나 가득 부어놓은 나락 너느라고 어머니 혼자 부산하다. “저녁참은 뭣한디야?”며 입으로는 참거리 걱정이어도 한줄기 바람이라도, 한점의 햇살이라도 놓칠세라 쌓아진 노란 나락을 곱게 곱게 펼친다.

경운기가 마당에 퍼대놓은 노란 나락 더미 위에 올라가 삽질하는 기분도 삼삼하다. 나락 삽질용 플라스틱 삽을 푹 질러넣어 마당가로 훠이 펼치니 “자크르르” 똘망똘망한 소리내며 나락들이 마당을 뒹군다. 나무로 만든 당그레로 하우스 2동과 마당에 있는 나락들 펼쳐놓으니 오랜만에 굵은 땀 젖은 몸이 개안(운)하다.

“국시(국수)나 삶을까?” 고민하는 어머니에게 ‘짜장면’으로 일손 좀 면해보려고 제안해봤지만 오는 시간 동안 불어서 이도저도 아닌 것 된다며 퇴짜맞았다. 힘 좋은 내가 나락 젓겠다고 자청하니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방으로 들어가신다.

말간 하늘과 동무해 고무신발로 이리저리 나락 재치며 오락가락하니 70줄이 다된 생곗양반이 한 경운기 거뜬히 퍼다놓고 덜덜거리며 떠난다. 퍼놓은 나락 널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며 ‘후두둑 후두둑’ 예고에 없던 빗방울이 세차게 들이친다. 어머니와 나는 혼비백산해지고 “승혁아 언능 나와봐야” 하며 아들놈까지 불러내서 처마 밑으로 포장 끌어당기고 삽질한 끝에 비 세례는 면했지만 오늘 벼베기는 끝이다. 콤바인은 물과 상극이라 아침 이슬이 걷히고 나서야 일을 시작하는데 비가 쏟아지니 오늘 일은 여기서 “쫑” 낼밖에….

30마지기 중 남은 17마지기는 3일 뒤로 날 받아놓고 저녘 밥숟갈 놓기 바쁘게 놉 얻느라 아버님 전화통에 매달린다. 다행히 오늘 일해준 양반들 서로 품앗이인지라 쉽게 응낙하고 그제사 두 노인네 고단한 몸을 뉘인다.

한톨의 쌀도 시피(업수이) 보지 말자. 농민들의 고단한 땀알갱이인 것을….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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