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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영광댁 사는 이야기 등록 2003.01.08(수) 제442호

[영광댁 이야기] 파프리카 아줌마의 꿈

진녹색의 덜 익은 놈들부터 빨갛고 노란 물을 들인 애기 머리통만한 파프리카가 한겨울 하우스안을 꽃피우고 있다. 달큰하고 물이 찍찍 흐르는 파프리카에 맛들이려면 솔찮이(많이) 입맛 다셔야 할 것 같다.

시골 점심 챙겨먹고 영란씨 집 앞의 하우스로 들어서니 공기 샐 틈 없이 보온막을 덮어놓아 어간해서는 문을 찾기도 어렵다. 지난 봄 하우스 문을 못 찾아 헤매다 돌아갔던 이야기를 하자 파프리카 아줌마는 “돈 날라간께, 꽉꽉 막아야 혀”라며 새살을 떤다.

바깥의 추운 날씨가 무색하게 따뜻한 하우스 안에는 내 키를 훌쩍 넘은 파프리카 줄기들이 하늘로 뻗쳐 있다. 파프리카 따는 일은 고난도의 숙련이 필요하므로 풀이나 매자더니 커 올라간 줄기를 줄에 감아주는 일을 하잔다.

놉(일꾼)일치고는 손님 대접이다 싶다. “쭈그려 앉지도, 허리 굽히지도 않고 서서 줄기 감아올리는 일이 뭔 일이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수다와 시작된 일손은 두 아줌마의 입심을 따라가지 못한다.

파프리카 아줌마는 나보다 1살 많지만 친구처럼 지낸다. 결혼하고 남편 군대 보내고 시부모랑 시골에서 방앗간일 거들며 살아왔던 세월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하지만 결혼 일찍한 덕에 벌써 큰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이다.

서울에서 대학 나오고 한 2년 직장생활 잘하던 남편이 갑자기 시골로 내려가자는 소리에 벼락맞은 듯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지 모른단다. 고향으로 내려와 소도 키우고 논농사도 짓고 하다가 5년 전 시작한 파프리카 때문에 꼼짝없이 하우스 농사꾼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아직도 놓고 싶어하는 영란씨는 못 피워낸 소중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 문화원의 추천으로 인근 대학 국악과에 입학하고 싶어했던 영란씨는 한달여 동안 열병을 앓았다. 넘치는 끼와 주변의 추천, 자신의 열망을 고스란히 하우스와 아이들 뒷바라지, 남편 내조에 내어주기로 마음먹기까지 자신이 품고 있는 소망에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끝내 이루지 못할 꿈이라도 시험만이라도 치르고픈 마음에 실기시험 끝나고서야 마음을 잡은 영란씨는 파프리카와 이야기하고 자연과 바람에 기대어 마음을 훨훨 날려보내곤 한다.

반나절 파프리카 순을 감아올리다 보니 다리도 어깨도 뻑적지근한 게 은근히 사람 잡는 일이다. 지난 여름 “어깨병신 다 됐다”며 읍내로 물리치료 다니던 것도 이런 일 때문이란다.

그래도 한여름이 되면 헉 소리가 나도록 찌는 더위와 싸워도 지칠 줄 모르고 매달리는 파프리카 수확하는 일이 재미지다는 말에 혹해 2003년 여름 하우스 일꾼을 약속하고 만다. “5년 뒤면 중국 땜시 이 농사도 힘들다네. 긍께 열심히 해서 빚이라도 꺼나가야지.” 남편과 열심히 일한 덕에 아직까지는 괜찮지만 투자비가 만만치 않은 하우스 농가의 불안함이 남는다.

자연의 일부로 사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파프리카 아줌마의 꿈이 펴지는 날이 언제 오려나…. 그녀가 차려준 푸짐한 저녁 밥상만큼이나 새해에는 ‘푸진 세상’을 꿈꾸고 싶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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