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ww.hani.co.kr/h21![]() |
![]() |
|
기사섹션 : 영광댁 사는 이야기 | 등록 2002.09.18(수) 제427호 |
![]() |
[영광댁 사는 이야기] 한가위 대목장날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안개낀 새벽녘이라 조심운전하며 코앞의 깜박등을 지나치고 보니 고추푸대를 잔뜩 싣고 안개를 가르며 장으로 향하는 경운기 몇대가 보인다. 나도 잘 손질한 태양초 120근을 차에 밀어넣고 오랜만에 나서는 고추장이다. 장터에는 안개도 저만치 물러서 있고 초입부터 고추푸대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차가 서자마자 벌써 저만치 중간상인인 듯한 이가 서넛 뛰어온다. 시골장에선 푸대며 보따리를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다. 장날 버스에서 큰 보따리라도 내릴라치면 새끼상인(가게 없이 중간상인 또는 상가에 물건을 넘겨 이익을 봄) 아줌마들이 달려와 승강이를 벌인다. “내가 젤 첨 잡았잖여” “난 먼저 봤는디” “저 보따리 내 꺼다고 말부터 혔잖은가”며 옥신각신한다. 이쯤되면 보따리 주인이 판단을 잘하지 않으면 큰싸움난다. 콩이나 팥도 아닌 애기옷을 담은 큰 가방 덕에 나도 새끼상인 아줌마들의 싸움에 말려든 기억에 웃음이 난다. “희나리(하품고추)요?” “아녀, 좋은 놈만 골라 왔당께.” 내려놓기도 전에 장사꾼과 생산자인 어머니의 흥정이 시작된다. 빼곡이 들어찬 사람에, 고추에, 트럭에 밀려 뒤편으로 돌아나오니 한만이네 부부, 양동양반은 흥정이 섭섭했는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상인의 트럭으로 고추를 올려주고, 택시운전하는 소씨아저씨는 언제 고추농사지었는가 싶게 한 트럭 싣고 나와 있다.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9월 1일장엔 고추 한 주먹도 나오지 않았는데 추석대목장 볼 양으로 농가에 있는 고추가 모두 쏟아져나왔나 보다. 새벽같이 나오느라 난 눈곱도 못 떼고 나왔는데 각각의 고추 앞에 선 아줌마들의 매무새가 심상치 않다. 깨끗한 나들이옷에 화장까지 한 사람이 고추주인이고, 돈전대 차고 어슬렁거리는 아저씨 아줌마는 영락없는 상인들이다. 7시도 안 됐는데 군내버스는 마을사람들을 잔뜩 채우고 신호대기선에 진득히 서 있다. 고추 판 돈으로 이미 해장국밥집은 소주잔을 기울이는 어르신들로 만원이고, 오랜만에 활기 찾은 고추장 덕인지, 추석 대목장 덕인지 옷·모자·생선·얼가리배추·사과·배 등을 파는 상인들의 펴고 다듬는 손길이 분주하기만 하다. 결국 어머닌 4일 전 고창장보다 500원 싼값에 넘겼다며 서운한 맘을 감추지 못한다. 늦고추가 없어서 고춧값이 더 오르려니 했건만 기대 이하다. 시골 5일장은 농촌사람들에겐 백화점이다. 각종 농산물을 이고 들고 나온 농민들, “포도나 사과가 싸요”를 외치는 과일장수의 소리를 귀따갑게 들으며 개나 닭 오리, 토끼를 파는 동물전과 우시장을 지나치면 속옷부터 일복, 정장까지 노점 옷가게가 즐비하게 이어진다. 그릇, 화장품, 조화, 새장의 새까지 구경하고 나면 튀밥집의 “뻥이요” 소리에 때맞춰 귀 막고 뛰어가야 하고 거리돈가스, 번데기, 튀김까지 한몫 거들어 거뜬한 하루 쇼핑이 된다. 장터 한쪽 끄트머리에 할머니가 하염없이 고구마순을 다듬으며 콩 한 주먹, 상추 한 주먹, 고구마 몇알을 두고 앉아 있다. 이것저것 담으며 덤으로 주는 인심뿐 아니라 친정엄마의 정을 맛보고 싶어서일까, 젊은 애기엄마들이 고구마순 할매에게로 모여든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