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민의 음식이야기 ] 2002년09월18일 제427호 

스텐카 라진, 보드카 원샷!

러시아 농민봉기와 70년 반독재투쟁을 기억하며 ‘www.인사동’의 보드카를 들이켜다.


사진/ 보드카 한잔에 지그시 눈을 감고 역사를 돌려 350여년 전 열혈남아 스텐카 라진을 떠올린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자여, 예속을 강요받은 자여, 봉기하라! 우리 코사크는 항상 그대들과 함께 하리라.”

1670년 러시아의 농민 지도자 스텐카 라진은 알렉세이 1세의 학정과 봉건 영주들의 수탈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우크라이나 전 지역 농민들에게 위와 같은 ‘매혹의 편지’를 비밀리에 전한다. 드디어 1만여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스텐카 라진은 볼가강 유역 차리친을 함락하고, 이를 본거지 삼아 볼가강을 따라 북상해 연안 도시들을 초토화하면서 귀족·영주들의 토지문서를 불태우고 창고에 쌓인 곡식을 굶주린 농민들에게 분배한다.

러시아 전역을 뒤흔든 농민봉기는 황제의 매수에 넘어간 동지의 배반으로 스텐카 라진이 체포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두 팔이 잘리고, 두 다리가 잘리고, 마침내 목이 잘려 처형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러시아 농민들은 그의 죽음을 믿지 않고 스텐카 라진이 언젠가 다시 나타나 그들을 이끌고 폭정과 수탈을 쳐부수리라 생각하면서, 그 유명한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을 만들어 노래하며 전설을 이어갔다.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은 바리톤 솔로로 들어도 좋지만, 역시 압권은 굵직하고 묵직한 러시아 남성 합창단의 합창이다. 러시아 영화사의 전설적 거장 에이젠슈테인의 동명의 영화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합창 <스텐카 라진>은 그야말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스텐카 라진의 농민군은 볼가강가 차리친을 점령한다. 그런데 그 성 영주의 딸인 공주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스텐카 라진과 농민군 모두 공주의 아름다움에 빠져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고 의심하는 등 한때 군기가 혼란에 빠진다. 다시 볼가강을 건너 탐욕과 압제의 다른 봉건 영주를 공격해야 하는데…. 스텐카 라진과 공주, 그리고 농민군들은 배를 타고 볼가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배가 강 한가운데 이르자 스텐카 라진은 공주를 두 팔에 안고 농민군들 앞에 선다

“나는 공주를 사랑한다. 그리고 압제와 굶주림에 시달려온 여러분인 농민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내 조국 러시아를 더 사랑한다.” 스텐카 라진은 연설을 마치고는 뚜벅뚜벅 뱃전으로 걸어가 공주를 볼가강으로 던진다. 슬로 모션으로 팔랑팔랑 공주가 떨어져내리고, 공주의 몸이 강물 위에 닿는 순간 우렁찬 남성 합창 <스텐카 라진>이 들려오고, 말을 탄 농민군 수만명이 전속력으로 성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 물 위에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페르샤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띤 그 입술에 노랫소리 드높다.

돈코사크 물 위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의 볼가강은 흐르고

꿈을 깬 스텐카 라진 외롭구나 그 모습.



숨죽여 몰래몰래 선배들로부터 전해내려온 이 노래는 1970년대 박정희 폭압정권에 맞서 싸운 학생운동가들이 즐겨 불렀다. 어쩌다 선배나 친구의 결혼식 뒤풀이에라도 함께 모이면 꼭 한번은 이 곡이 나오게 마련인데, 특히 음정과 박자에 상관없이 과감하고 소신 있게 부르는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유인태(전 국회의원)의 노래가 각광을 받았다.

나는 <스텐카 라진>을 듣고 싶으면 언제나 보드카 전문집 ‘www.인사동’(02-725-5295)엘 간다. 이 집에는 바리톤 솔로의 <스텐카 라진>도 있고, 돈코사크 남성 합창단이 부른 <스텐카 라진>도 있다. 보드카는 와인이나 코냑처럼 격식 찾고 폼 잡고 하는 술이 아니다. 그냥 이 집의 품격 있는 여주인 박영숙씨가 칵테일해주는 대로 마시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역사를 돌려 350여년 전 열혈남아 스텐카 라진의 분노와 열정, 사랑과 좌절에 푹 빠져볼 일이다.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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