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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김학민의 음식이야기 등록 2002.08.08(목) 제421호

[김학민의 음식이야기 막국수에 풋풋한 산골 인심

옛날 산간지역 막국수의 구수한 맛을 그대로 간직한 가평군 막국수

우리나라에서 농경이 본격화된 삼국시대 이후, 농업은 특히 강수량과 기온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가뭄이 들 때는 겨레 전체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려왔다. 그래서 일찍부터 흉년에 주식을 대체할 수 있는 식품들을 조사·개발했으니, 이름하여 구황식품이다. 그 종류는 놀랍게도 초근목피 851종에 이른다.

조선 중기에 간행된 <구황촬요>와 <증보산림경제>에는 우리나라의 농어촌과 산간지역에서 기근시 상용한 구황식품들이 나와 있다. 깊은 산간지역에서 살아가는 화전민의 식량은 밤과 옥수수, 감자, 메밀이 주종을 이루며, 이것이 부족할 때는 고사리, 둥글레, 소나무 껍질, 도토리, 도라지, 칡뿌리, 더덕, 마, 백합, 두릅 등을 섞어 먹었다. 호서지방 농촌지역에서는 메밀 등 잡곡을 심어 주곡의 소비를 줄이고, 채소잎과 뿌리를 말려 저장해 쌀·보리와 섞어 죽이나 밥을 해먹었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기근이 들 때 심지어 황토흙까지 국이나 죽에 새알심처럼 만들어 넣어 먹기도 했으니,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이처럼 모질 수 있을까?

옛 문헌에는 메밀이나 메밀꽃이 구황식품에 들어가 있지만, 기근 단계에서 보면 메밀이라도 먹을 수 있을 때는 어떻게 보면 행복한 시기다. 우리 겨레의 식생활에서 곡기로서의 메밀의 가치는 그리 높게 평가되지 않지만, 산과 들을 헤매어 구한 초근목피로 굶주림의 고통을 삭이는 것에 비하면 아주 훌륭한 먹을거리기 때문이다.

메밀은 거름기가 전혀 없는 산비탈 자갈밭에서도 잘 자란다. 또 웬만한 가뭄에도 싹이 잘 나서 견디며 초가을 흐드러진 꽃을 피우고 알곡을 맺는다. 중부지방에서는 가뭄이 들어 유월 중순까지도 모를 내지 못하면 눈물 반 한숨 반으로 갈라터진 논바닥을 대강 일궈 메밀을 심는다. 가을이 되어 갈무리된 메밀 알곡은 기나긴 흉년의 겨울을 보내는 데 요긴히 쓰인다. 메밀묵을 쑤워먹는 것은 사치이고, 대개 맷돌로 메밀을 둘둘 갈아 체로 친 다음 반죽해 수제비를 만들어 먹는다. 까끌까끌 제대로 갈리지 않은데다 껍질까지 걸러지지 않아 끈기 없는 수제비가 입안에서 빙빙 돌지만, 조금이라도 불평을 할라치면 어른들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처럼 중부지방의 농촌에서는 메밀을 상시적으로 많이 심지 않아 먹을거리로서 메밀 요리법이 단순하지만, 산비탈 자갈밭에 계속 메밀을 심어온 강원도 산간지역에서는 일상적 먹을거리에서 메밀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강원도 산간지역에서는 예부터 집집마다 막국수를 눌러 먹었다. 메밀을 맷돌로 갈아 체로 친 다음 뜨거운 물에 반죽해 국수틀로 눌러 국수를 뽑는다. 막국수의 ‘막’은 껍질째 맷돌로 간 까끌까끌한 메밀가루 때문에 붙은 접두사다. 양을 늘리기 위해 메밀 갈은 것을 일부러 듬성듬성한 체로 쳤다.

제분기로 가루를 내고 전기 국수틀로 국수를 뽑지만, 옛날 막국수 맛과 넉넉한 산골인심을 그대로 간직한 막국수집이 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명지산 입구에 있는 이름 없는 ‘막국수’집(031-582-5568)이다. 주인 아주머니 김해연(64)씨는 15년 전부터 지나가는 길손이나 허기진 등산객들의 요구로 주는 대로 돈을 받고 막국수를 말아주기 시작했다. 단 한 그릇이라도 바로 반죽해 국수를 뽑는데, 간간한 육수에 매칼한 양념을 넣고 말아 시골 열무김치 얹어 먹으면 육수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셔도 뒷맛이 담백하다.

한 그릇에 3천원이지만, 주인 아주머니 마음이 좋아 막국수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나 허기진 사람은 반죽하기 전에 더 요구하면 그 값에 듬뿍 말아준다. 막국수 이외에 술·부침개·수육 등 다른 메뉴는 일절 없으며, 아쉽게도 일요일에는 쉰다.

가평읍에서 북면 방향으로 10km 간 뒤 갈림길에서 적목리(명지산)쪽으로 10km쯤 가면 도대2리 마을이 나온다. 조심해서 살펴야 찾을 수 있다. 도로 오른쪽에 ‘막국수’라고 쓴 노란 페인트칠을 한 프로판 가스통이 유일한 간판이다.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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