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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월드컵 | 등록 2002.05.15(수) 제40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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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월드컵, 그 광장의 카니발 축구 읽기 12 ㅣ 문화적 축구
유쾌한 해방 체험하는 축제의 마당… 놀이와 즐김의 자리에서 소외자 없어야
월드컵 분위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아 걱정스럽다고 한다. 축구 관계자들, 또 축구제전을 빌미로 한몫 단단히 잡을 궁리를 하는 사람들한테서 나오는 소리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다가오는 월드컵에 대한 설렘이나 열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개개인의 살림에 여유가 없고 나라꼴도 한심한 판에 한낱 공차기 대회에 들떠야 할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이 다수 국민의 생각인지 모른다. 옳은 생각이다. 어쩌면, 지금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정부나 기업이 주도하는 국가적 행사에 거듭 동원되면서 우리 사회 성원들이 단련해온 이성적 자기관리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넘기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남는다. 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에게 월드컵이란 얼떨결에 받아놓기는 했지만 처리할 방법을 알지 못하는 과분한 잔칫상이 아닌가?
대중이 외면하는 과분한 잔칫상?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가 아니라 야구다. 알다시피 축구의 인기는 국가대항전, 특히 한·일전에 필요 이상으로 불꽃을 튀기는 반짝 인기일 뿐이다. 반 세기 동안 미국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온 나라가 미국 주변의 몇몇 나라와 더불어 야구를 숭상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월드컵이 한달도 안 남았는데 신문 체육면 톱이 한결같이 야구기사임을 발견한 히딩크 감독의 놀라움은 우리만의 독특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정직하라는 것은 세월이 흘러도 유용한 처세훈이다. 이 교훈을 따른다면 한국은 축구보다 야구 월드컵을 유치하는 나라여야 했다.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소리 같지만, 국민 다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관심 없이 차린 축구축제 앞에 무턱대고 신명을 내라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다. 자발성에 뒷받침되지 않은 축제는 축제의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없는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제대로 된 축제다. 공동체가 스스로의 재생산과 경신을 위해 치르는 유쾌한 해방의 경험, 그것이 축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위계질서에서 벗어나 몸으로 어울리며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놀이와 즐김의 공간이다. 하지만 전래의 농경공동체가 이어오던 축제는 오늘 사라지고 없다. 빈 자리에 남은 것은 무수한 사적 축제들의 각개약진일 뿐 새로운 공공의 축제, 또 그것을 담을 무대는 나타나지 않은 듯하다. 이 말은 오래 전에 작가 최인훈이 말한 의미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부대끼며 서로를 변화시킬 ‘광장’이 여전히 우리에게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 사라졌거나 아직 없는 ‘광장의 축제’를 축구와 월드컵이 대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망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축구와 월드컵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광장의 축제 건설을 위한 쓸모 있는 모델이나 연습일 수 있다. 단순하고 보편적인 민중의 놀이이자 거리낌없고 화려한 육체의 움직임이 교환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축제의 정신에 잘 맞는 스포츠가 바로 축구기 때문이다.
노점상과 함께 광장의 축제를…
물론 이 같은 자질들에는 양면이 있다. 축구는 놀이면서 점점 더 고도의 훈육과 규율이 다스리는 노동으로 변해간다. 또 축구가 드러내는 바와 같은 찬란한 육체성에 대한 찬미는 파시즘의 구성요소기도 하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처럼 육체의 찬미자들은 살인자와 가장 가까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축구도 삶에 적대적인 힘과 우호적인 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장 속에 상시적으로 놓여 있는 셈이다. 여기서 축구를 삶을 북돋우는 힘, 에로스의 기제로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이다. 이것이 이번 월드컵이 축제여야 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고, 월드컵을 정보기관의 감시체계를 강화하는 구실로 삼거나 ‘도시 미관’을 위해 노점상들을 무작정 내쫓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까닭이다.
손경목 l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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