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철학카페(마지막회) ㅣ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기계와 인간의 예술적 만남 주선… 테크놀로지 이용한 지각구조 확장
현대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다양한 기계들을 만들어냈다. 현대인의 삶은 기계에 파묻혀 있으며 가전제품이나 문화상품 없는 삶은 거의 상상하기 힘들다. 기계의 발달은 또한 매체의 발달을 낳았다. 매체란 소통의 도구이자 이미지들의 전달체다. 매체를 통해 정보와 이미지가 전달되고 소통된다. 현대 예술은 테크놀로지와 만나 매체의 예술을 낳았다.
TV의 역기능을 창조의 밑거름으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TV라는 기성 매체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무엇보다 TV 매체는 송신의 일반성을 통해 대중들의 눈과 뇌에 일방적인 취향과 정보를 쏟아붓는다. 쌍방적인 소통은 불가능하며 사람들은 멍하니 바보상자 앞에 앉아 그것이 쏟아내는 정보와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얼마 전 끝난 월드컵 기간 내내 우리는 TV라는 것이 얼마나 일방적인 가치와 조작된 이미지, 편집된 정보를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강요하는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막대한 자본이 있어야만 참여할 수 있는 TV 사업은 때로 국가 권력과 결탁해 고도의 이데올로기 조작을 행하는 폭력적 매체가 된다. 대중의 얼을 빼는 장치들이 소설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TV로 진화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첨단의 얼빼기 장치인 ‘게임 천국’의 시대에 살고 있다.
비디오 아트는 TV의 이런 현실에 비판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예술로서, TV와 비슷한 기술적 토대 위에서 작업을 한다. 하지만 그 미학을 뚜렷하게 달리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특성은 비결정성에 있다. 미리 짠 각본에 따라, 더구나 고위층의 입김이 들어간 각본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미지를 내보내는 TV와는 다르다. 비디오 아트는 팝 아트나 키네틱 아트가 그렇듯이 익명적이고 몰개성적이다. 비디오 아티스트는 비디오를 기술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예측 불가능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물론 기계를 조작하는 것은 아티스트지만, 결과는 조작자 자신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조작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런 비디오 아트의 특성은 인간의 지각 경험을 새로운 차원으로 넓혀준다. 무작위적인 이미지의 운동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전의 고착화된 이미지를 떨치고 순간마다 새로운 이미지들에 접하게 한다. 경우에 따라서 비디오를 바라보는 사람이 그대로 비디오에 찍혀 그 비디오에서 상영되는데, 그럴 경우 그 사람은 바라보는 주체인 동시에 바라봄의 대상인 객체가 되는 복잡한 경험을 한다. 나아가 비디오에 시청각만이 아니라 다른 감각을 덧붙일 때 관객은 또 다른 독특한 지각을 경험한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확장을 가져온다. 망원경이 인간의 시각을 확장시켰듯이, 비디오 아트는 인간의 지각구조를 넓힘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 자체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기계와 유기체의 경계 허물어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를 역동적으로 설치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운동감각을 선사한다. <물고기 하늘을 날다>(1975)라는 유명한 설치작품에서는 비디오들이 공중에 매달려 전시되었다. 비디오들에서는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는데, 그것을 보려면 관객은 목이 부러질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위를 쳐다보거나 아예 바닥에 누워야 했다. 이 설치는 관객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물고기들이 하늘을 나는 특이한 경험과 함께 누워서 화면을 보는 또 다른 경험이 이 설치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비디오 아트는 기계와 유기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기계-인간을 만들어낸다. 비디오 아트의 장치가 복잡해지고 인간과의 관계가 점점 유기적인 것이 될수록 인간은 더 이상 기계의 바깥에 서 있기보다는 그것과 혼연일체가 된다. 기계는 점점 인간적이 되고, 인간은 점점 기계적이 된다. 이 점에서 비디오 아트는 사이버펑크(cyberpunk) 소설이나 영화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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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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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또한 비디오로 로봇을 만들기도 했다.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 화면에 등장하는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비디오 자체를 어떻게 설치하느냐도 중요하다. 곧 비디오 아트는 하나의 조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각 개념을 더 넓게 활용하면 일종의 비디오 로봇이 가능하게 된다. 백남준은 비디오로 여러 물체를 만들었으며 마침내 인간(로봇)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로봇 가족」이라는 작품에서 50년대 수상기로 할아버지·할머니를, 70년대 수상기로 아버지·어머니를, 그리고 최근의 수상기로 자식·손자를 만듦으로써 기계에 생명을 부여했다. 이런 작업은 기계시대에 기계를 인간화하려는 하나의 시도로 볼 수 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해프닝 예술에 참여했는데, 그는 해프닝적인 예술과 비디오 아트를 교묘하게 묶어 새로운 장르를 창출해냈다. 이것은 TV의 생방송을 이용해 일종의 공연을 조직하는 것으로 하나의 ‘전자 오페라’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전자매체를 인공위성과 연결해 전 세계에 내보냄으로써 ‘우주 오페라’를 조직했다고도 할 수 있다.
시대적 화두인 동서화합에 기여
유명한 작품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에서는 여러 공연들을 섞어 전 세계 대도시들에 동시에 내보냄으로써 거대한 예술적 ‘사건’을 창출해냈다. 여기에는 음악·무용공연, 시 낭송, 비디오 방영 따위가 복합적으로 얽혀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동·서양을 복합적으로 연계시킴으로써 세계 전체가 하나의 축제로 어우러지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했다. 이 점에서 백남준의 예술은 동서화합이라는 시대적 화두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백남준은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스포츠와 예술을 잇는 대규모 공연도 기획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대규모 장르를 기획했다. 그러나 공연내용은 그해 서울의 상황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현실에 발을 디디지 않은 상상적 가치가 때로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허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철학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