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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이정우의 철학카페 | 등록 2002.05.08(수) 제40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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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 그림으로 철학한다 이정우의 철학카페 28 ㅣ 현대 회화와 의미의 산종(I)- 르네 마그리트
심오한 존재론 드러낸 생각하는 회화… 떠도는 의미들에 역설의 세계 담아
의미란 무엇인가? 현대 철학이 이른바 ‘의미론적 전회’를 이룬 뒤, 이 물음은 철학적 사유의 중핵들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의미란 매우 간단하게 처리되곤 했다. 인식론의 두 핵심은 객관사물과 인간의 영혼/정신이다. 객관사물은 우리에게 일정한 차이들(맛·색깔·촉감 등)로서 드러나고, 영혼은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사물의 성질 하나와 영혼의 관념 하나는 일대일 대응한다. 책상의 색깔과 ‘갈색’이라는 관념이 일대일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질과 관념 사이에 기호가 존재한다. 기호 역시 성질 및 관념과 일대일 대응한다. 성질, 기호, 관념이 일 대 일 대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를 마치 거울처럼 비춘다. 서구 철학은 이렇게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대전제 위에서 움직여왔으며, 기호와 의미 또한 그런 바탕 위에서 이해되었다. 현대 철학에 이르러 의미는 더 이상 간단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기호논리학이 일상언어의 모호함을 제거하고 이상언어를 구축하였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언어의 역사적 두께와 숨겨진 의미의 존재를 추구한 해석학을 구축하였다. 언어학이 의미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할 때, 문학은 새로운 의미들을 끝없이 탄생시킨다. 현상학이 인간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노에마(의식의 대상:편집자주)로서의 의미를 이야기한다면, 구조주의는 자체로서는 무의미한 요소들의 조합에서 생겨나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과 라캉 이후 의미론은 그야말로 백가쟁명의 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의미란 더 이상 일의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무수한 의미들이 다채롭게 흩뿌려진 것이다. 의미의 산종(散種). 무수한 의미들이 흩뿌려지는 현대
20세기 회화 역시 의미의 산종이라는 20세기 사상사의 빼놓을 수 없는 한 갈래를 이루고 있다. 칸딘스키를 비롯한 추상화가들이, 예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실재’를 다시 찾으려는 고전적인 존재론을 추구했다면, 초현실주의자들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은 의미를 산종시킴으로써 실재의 복수화를 꾀했다. 현대 화가들은 실재를 제거하거나 부정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복수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 학문과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의 죽음’이 아니라 ‘…의 복수화’다. 20세기 문화는 죽음의 문화가 아니라 다원화·복수화의 문화인 것이다. 이런 흐름의 한가운데에 르네 마그리트가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의미의 산종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보고 느끼는 회화가 아니라 생각하는 회화의 전형이다. 마티스의 그림이 매우 단순한 내용을 극히 감동적인 색과 힘으로 보여준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필치로 심오한 존재론을 보여준다. 마그리트는 그림으로 철학한 철학자다. 이 점에서 마그리트는 구조와 힘을 중심으로 감성적 실재를 추구한 현대 회화의 흐름과는 다른 또 하나의 굵은 흐름을 대표하고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왜일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의미가 일정하게 안정되고 일반적으로 승인된 세계지만, 마그리트 회화세계는 의미가 끝없이 불안정하게 유동하고 정착하지 않는 세계기 때문이다.
상식적 의미론 너머의 다른 세계들
상식의 세계는 ‘doxa’의 세계다. 즉 통념의 세계다. 우리는 수박이 사과보다 크고, 건물은 고체기 때문에 휘어지지 않고, 내일은 오늘 뒤에 온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의미가 안정되지 않는 삶은 혼란스럽고 어지럽다. 그래서 일상세계는 의미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한다. 마그리트 세계는 ‘para-doxa’의 세계 즉 역설의 세계다. 마그리트가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안정된 의미의 세계는 무한히 가능한 세계들 중 하나일 뿐이다. 마그리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를 넘어, 이 세계를 떠받친 상식적 의미론을 넘어서 다른 세계들, 다른 의미들을 그려낸다. 상식이 볼 때는 ‘non-sense’인 그러한 ‘sense’들을 그려내는 것이다. 1926년 작 <비밀 경기자>는 의미의 혼란을 잘 보여준다. 높이 솟아 있는 기둥들은 체스의 말들이다. 체스의 말들이 사람보다 커서 매우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크기에 대한 일정한 척도 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갓난아기가 어른보다 더 크다면, 딸기가 수박보다 더 크다면, 구슬이 남산만 하다면. 크기의 변화만으로도 우리는 어지러운 현기증을 느낀다. 마그리트 그림에서 크기의 놀이는 자주 등장한다. 게다가 체스 말 위로는 가지들이 뻗어가고 있다. 경기자들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무엇을 몽둥이로 때리고 또 무엇을 받는 것일까? 두 사람은 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인 것 같기도 하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거북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오른쪽의 여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어떤 의미도 정착하지 못하고 화면 위를 떠다닌다. 1941년작 <향수>는 다리 위에 서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등에 날개가 달린 것 외에는 충분히 가능할 수도(현실 속에서 가능할 수도)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조화를 이룬다. 사자와 남자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있으며 이것이 화면의 통일성을 깬다. 난간 위에 세워진 가로등은 어떤가. 어떤 형태로든 화면의 통일성을 기하는 전통회화와 무척 대조적이다.
역설과 무의미의 세계를 이미지화
1964년 작 <지는 저녁>도 인상적이다. 유리가 깨져 방안에 널브러져 있다. 그러나 바닥에 깔려 있어야 할 유리들이 세워져 있다. 놀랍게도 깨진 유리들에는 그것들이 깨지지 않았을 때 비추었을 장면들을 여전히 비추고 있다. 마치 바깥의 광경이 유리에 착색된 뒤 유리가 깨졌다는 듯이. 가운데의 붉은 태양은 깨진 유릿조각들에 옮겨와 그대로 새겨져 있다.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이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우리에게 일상의 의미론을 재고하게 한다. 마티스의 그림이 우리로 하여금 감성적 힘이 좋아 끝없이 다시 보게 한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은 논리적 구조가 이해되지 않아 자꾸 다시 보게 한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역설과 무의미의 세계를 뚜렷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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