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대접받지 못하는 이들의 친절한 벗, 국가인권위 인권침해 조사관 정상훈씨
국가인권위원회는 서울시청 옆에 있다. 근처 빌딩 주차장 아저씨들한테 물어물어 찾아갔다. 아직도 인권위원회 위치가 어디인지 모르는 것은 내가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인가 아니면 잘못 살고 있다는 증거인가 지난해 말 문을 연 인권위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보건소장직에서 밀려난 어느 의사의 진정을 필두로 그동안 ‘쌓인 게’ 많은 사람들의 호소를 들어오고 있다. 인권주간을 맞아 대한민국 인권1번지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
보훈처 공무원으로 일하다 자원
오후 늦은 시간, 인권위 상담센터 접수대 앞에서 한 남자가 상담신청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직원과 얘기했다. 옆에서 들어봐도 분명 직원 잘못은 아닌 듯한데 신청 도중 그의 감정은 이미 폭발한 것 같았다. 뒤에서 기다리던 또 다른 남자는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나를 직원으로 봤는지 자기 얘기를 좀 들어달라고 했다. 내가 아니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벌써 가방에서 서류뭉치를 주섬주섬 꺼냈다. 길가에 서 있는 전봇대한테라도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인 모양이다.
“정말 진정 내용 하나하나가 사연이 많습니다.” 인권침해 조사국 조사관 정상훈(39)씨가 말을 시작했다. “진정사건을 다루다 보면 그 안에 갖가지 인생사가 얽혀 있는 게 보여요. 사연을 읽다 보면 참…. 어떨 때는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고 흥분이 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복잡해지죠.” 부드럽고 여린 인상과는 달리 정 조사관의 어투는 강하다.
그는 지난 5월부터 인권위로 온 전입생이다. 하지만 벌써 10년 경력의 베테랑 공무원이다. 지금은 7급이지만 그는 애초 9급 공무원 생활부터 시작했다. 나이 제한은 있지만 학력 제한은 없는 공무원 시험. 지방직과 국가직 모두 응시했다. 운 좋게 둘 다 합격. 그런데 그의 공무원 생활은 처음부터 범상치 않았다. 먼저 지방직 발령이 나서 출근했는데 첫날 사고가 났다. 동사무소로 나가 쓰레기 수거차에 따라 나섰다가 덤프트럭 위에서 떨어진 것이다. 어른들이 일하는 데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올라갔다가 종이상자에 발을 헛디딘 것. 꼬박 두 달간 병원신세를 지는 사이 국가직에 발령을 받았다. 그래서 국가보훈처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보훈처에서 만족하며 일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해 인력을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원했다.
그가 인권위원회로 간다니까 동료들이 말렸다. ‘가지 마라’, ‘여기가 더 좋다’, ‘왜 사서 고생하려느냐’, ‘정권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곳인데 뭐하러 가느냐’ 등등 반대가 많았다.
“사실은 그쪽 업무에 공백이 생길까봐 그런 것 같아요.” 그가 보훈처에서 맡은 일은 주로 상담쪽. 사람들과 많이 접촉했다. 인상이 좋아 도움이 됐을 거라니까 민원인들은 자신이 바라는 만큼 일이 되면 “그 직원 인상 참 좋다”고 말한단다. 사람들은 그와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그도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좋다. 주로 듣는 편이지만. 인터뷰 중에도 자신의 특기를 살려 주로 들으려는 바람에 내가 좀 애를 먹었다.
그런데 왜 자원해서 왔나요 “사람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요.” 사실은 빚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이 길로 들어섰다고 고백한다. “저도 386세대거든요. 혼란스러운 시기에 친구나 선후배들이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며 가만있을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을 돌아보면….” 그는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는 사제의 길을 가기 위해 수련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그는 가만있지 않았다. 수단 차림을 한 신학생들이 시국에 항의하는 거리행진을 할 때 그 대열에 있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선배사제의 물음에 그는 목청 돋워 ‘철폐’를 외쳤다. 그는 사제의 길과 현실과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현실쪽 길을 택했다. 그는 어쩌면 신부로 남을 뻔한 사람이었다.
“달라진 것? 퇴근시간이 늦어졌죠”
“그런 시간이 아직도 제게 힘이 됩니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고, 이 길로 나가며 사회에서 함께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까 고민을 하던 중에 인권위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 관심을 가지게 됐지요. 민주화를 위해 애쓰는 분들은 결국 인간답게 살기 위한 세상을 만들려고 한 것 아닙니까 인권위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것, 제가 여기 와서 노력하는 게 그런 세상을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전에는 비교적 퇴근시간이 일정했고, 거의 정시에 업무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권위로 옮기며 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헌정 사상 최초로 인권위가 만들어지자 국민의 기대는 한껏 높아졌다. 이번에야말로 내 억울한 사연을 풀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사람들은 인권위를 찾아왔다. 지난해 11월 말부터 진정을 받기 시작했는데 4월부터 직원이 충원되기 시작해서 일의 진행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진정사건의 해결속도보다 진정건수가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른 셈이다.
“일이 너무 밀려 있어 진정인들이 바라는 만큼 빠르게 진행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이런 점이 시민들의 불만을 사기도 하지요. 게다가 국가기관이다 보니 법적용을 많이 받습니다. 법적 한계가 분명히 있지요. 초창기라서 겪는 어려움도 있고요. 그런데 조사라는 게 노하우가 쌓이다 보면 조만간 자리가 잡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 부분을 힘주어 강조했다.
정 조사관은 인권위가 민주화 도상에서 고생한 우리 국민 모두에게 ‘뜻 깊은 선물’이 돼야 한다고 믿는다. 인권침해와 차별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큰 언덕이 되고 싶은 것이다. “국가기관으로부터 본인이 생각하기에 기본권을 침해받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주로 찾아옵니다. 헌법 10조에서 22조 사이에 있는 내용을 보면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헌법… 흠, 헌법이라…. 그거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고 책으로도 있고, 관공서에도 다 갖춰뒀습니다.” 우리 동네 동사무소에 헌법, 그런 두꺼운 책이 있는가 하는 사이 그가 설명을 이어간다. “진정은 서류진정·면전진정으로 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가 할 수도 있고 제3자가 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내용이 접수되면 관련기관이나 해당자에게 관계자료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서면진술서를 요구하거나 현장에 가서 조사하기도 합니다.” 나는 대뜸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요청하면 다들 자료를 잘 가져오나요 예를 들면 검찰 같은 국가기관에서도 “네, 법상으로 국가안보에 지장이 있거나 수사 중이면 협조요청을 거부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협조해주죠.”
거기 시민단체 아니냐
정 조사관은 얼마 전 검찰청 피의자 사망사건을 예로 들며 인권위 조사업무가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고 했다. 이 사건의 조사는 인권위 직권으로 이루어졌다. 검찰청으로 조사를 나가는 조사관. 헤비메탈 사운드를 배경으로 바바리 코트 깃을 날리며 가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협조를 잘 해줬나요 “그럼요. 그쪽에서도 상당히 긴장하면서 조사에 응했죠. 그리고 저희 팀 분들이 모두 베테랑이라서 조사를 잘했죠. 검찰 관계자들이 혀를 내둘렀는걸요.”
그는 동료들에게 공을 돌렸다. 하지만 아직도 인권위에 대해 감감한 데가 많다. 같은 정부 기관이라도 인권위가 뭔지 모른다. “거기 시민단체 아니냐”에서 “뭐하는 곳이냐”는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 시간가는 줄 모르지만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인천에서 다니니 출퇴근시간만 하루에 세 시간. 일이 늦게 끝나니 두 아이 볼 시간이 거의 없다. 집에 가면 두 아이는 잠들어 있고, 아침에 아빠가 나올 때도 자고 있다. 아이들은 자고 있어도 아빠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느라 애쓴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인권이 뭐죠
그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대답한다. “사람답게 대접해주는 거겠죠. 가진 거 많고 지위 높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상식이 통하는 사회, 그거겠죠. 그리고 사람에 대해 문을 닫고 사는 게 아니라 열린 상태에서 조정하고 화해하는 것. 싸움을 하더라도 문을 열고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겠죠.”
정권은 바뀔 수 있다. 정책도 변할 수 있다. 그러나 바뀔 수 없는 것이 있다. 인권의 고귀함. “정권 바뀌면 인권위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정상훈씨 같은 이들이 지키고 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