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태클에 친절한 항의… 지구상에서 가장 이채로웠던 남북통일축구대회 관전기
사진/ 정윤수ㅣ문화평론가. (한겨레 강창광 기자)
세상에서 가장 이채로운 축구대회가 열렸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러나 승패의 지평을 넘어서는, 그럼에도 승부가 갈리지 않은 탓에 역시 축구란 ‘내기’의 냉혹한 면이 상실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두루 입증한, 이름하여 ‘남북통일친선축구대회’.
불쾌한 상식 밖 ‘전관예우’
우선 전광판의 글씨가 이채롭다. 대한민국 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도 아니고 남한 대 북한도 아니고 ‘남측 대 북측’. 현대사의 비극이 그 표현 속에 농축된 바 있어 영 어색하다. 국제 사회에 공인된 ‘양 측’의 공식 표현을 피해야 했고, 남한과 북한이라는 상식적 표현도 꺼려야만 했던 주최쪽의 지나친 고뇌가 낳은 표현이다. 물론 관점을 달리한다면 그저 윗마을하고 아랫마을이 겨룬 것이므로 오히려 더 ‘동질적’이긴 하다.
사진/ 남북통일친선축구대회는 담백하면서도 복합적이고, 비정치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축구 한판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경기였다. (김종수 기자)
남측 벤치의 맨 오른쪽 자리, 그 신성한 옥좌의 주인이 잠시나마 정체불명의 사람이었다는 점도 이채로운 풍경. 원래 그 자리의 당당한 위상을 확보했어야 할 박항서 감독이 옆자리로 물러서고 히딩크가 대신 전반전을 지켰다. 히딩크와 박항서는 상호 최상의 예를 갖췄지만 이 ‘절묘한 기획’을 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 상식 밖의 ‘전관예우’는 감독의 존엄성, 그라운드의 신성함, 인간적 예의를 상실한, 축구 100년 역사에서 감독이 자기 자리에 앉지 못한 ‘이채로운’ 기록이 되고 말았다. 친선경기 아니냐고? 그러나 동네 축구에서도 ‘지킬 것은 지킨다’. 남북한 화합의 한마당 아니냐고? 그렇다면 히딩크는 누구인가. 그는 대선 가도를 달리는 정몽준의 에이전트로 거기에 앉은 것인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장면을 연출한 축구협회의 ‘이채로움’은 음주운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는 한국 축구의 단면이 그대로 농축된 한 장면이어서 불쾌하다.
선수들도 ‘이채롭게’ 뛰었다. 심판의 휘슬 이후 양 선수들은 그야말로 그라운드가 명령하는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 몰입하였으나 막전막후의 친선 분위기가 선수들의 무의식을 지배했다. 상냥한 태클, 친절한 항의, 격려의 악수와 흐뭇한 미소로 격전의 그라운드는 아기자기한 ‘운동회’ 풍경을 자아냈다. 북한의 미드필더 한성철(기관차체육단)은 후반 37분께 최태욱에게 거친 태클을 해 최태욱이 쓰러지자 재빨리 다가왔다. 곧 이어진 사과의 제스처.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한성철은 심판에게도 고개를 숙였고 권종철 주심이 옐로카드를 꺼낸 뒤에도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관중의 박수가 이어졌지만, 조금 지나쳤다. 경기 그 자체를 음미하려는 ‘일부 축구팬’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지만 그러나 이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한 이채로움, 그 담백하면서도 복합적이고 비정치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축구 한판이었으니 이 점은 흥미로운 요소였다.
Jesus loves North Korea…
사진/ 막전막후의 친선 분위기가 선수들의 무의식을 지배한 경기는 아기자기한 '운동회' 풍경을 자아냈다. (김종수 기자)
위풍당당한 연설로 국제사회에 뚜렷한 인상을 남긴 북한의 리광근 단장의 칼칼한 목소리도 특이했고 국제축구연맹(FIFA)의 지속적인 권고, 그러니까 경기 직전의 세리머니를 가급적 짧게 끝내야 한다는 불문율을 가볍게 무시하면서 국악 합주단과 합창단의 도움 아래 <아리랑>의 절창을 보여준 소리꾼 장사익의 순서도 흥미로웠다. 특히 당연한 수순으로 양 선수들이 유니폼을 바꿔입은 뒤 대형 한반도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돈 경기 직후의 세리머니 또한 한반도에서만 가능한 ‘비극의 세리머니’가 아닐 수 없다. 국내외 언론이 이 점에 주목하여 ‘남북한의 화합의 한마당’이라고 표현한 것 역시 충분히 예상된 수순이었으나 막상 그 장면이 펼쳐지자 잠시 숨을 고를 수밖에 없는,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흔드는 장면이 되고 말았다.
아쉬운 것은 남한 선수들이 준비한 ‘이채로운’ 골 세리머니를 볼 수 없었다는 점. 골을 넣어야만 펼칠 수 있는 세리머니였기에 신세대 기대주들이 준비한 기상천외의 흥분을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잠시 상상만 해보자. 먼저 선취골을 넣었을 경우. 골을 넣은 남한 선수는 코너 라인으로 달려가 코너플래그를 뽑아 그라운드에 던진다. 나머지 선수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 깃발을 뛰어넘어간다. 그 사이 최태욱은 무릎을 꿇고 절실한 기도를 올린다. 선수들은 그 깃발을 분단의 상징, 곧 휴전선으로 삼아 뛰어넘기로 했던 것이다. 특히 독실한 신자인 최태욱이 분단의 휴전선을 뛰어넘는 선수들 곁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그것이 실제로 연출되었을 경우,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흥미로우면서도 간절한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추가골이 터질 경우도 준비했다고 한다. 세명의 선수가 유니폼을 벗어젖히며 속옷에 새긴 문구를 세계에 알리는 것. 이동국의 ‘남북통일’, 이천수의 ‘우리는 하나’, 이영표의 ‘Jesus loves North Korea’가 그것. 그런데 만약 추가골까지 터져 이 세리머니를 펼쳤다면 틀림없이 이영표 선수의 문구는 논란이 될 법도 하다. 특정 종교의 메시지가 뚜렷할 뿐만 아니라 왠지 ‘북측’의 사정을 지나치게 감안한 듯한 표현. 그 대신 이영표는 ‘양측’ 통틀어 가장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임으로써 경기의 밀도를 높이는 데 만족했다.
사진/ '통~일조국'보다 '대~한민국'이 더 자주 크게 울려퍼진 것은 '남측' 사회의 평균적 정서를 그대로 보여준 일이었다. (김종수 기자)
흥미롭고 이채로운 대회였지만, 사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무거운 기운이 경기장을 누르고 있었다. 북측의 보장성과 남측의 국정원이 막후를 관리하고 수많은 안전요원이 진을 쳤다는 점은 가벼운 논외의 대상. 오히려 중요한 것은 통일연대쪽에서 지속적으로 펼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정작 경기장 안팎에서는 ‘통∼일조국’ 함성이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 월드컵 때처럼 ‘대∼한민국’이 더 자주, 더 크게 울려퍼졌다는 점에서 나는 그 풍경이 통일에 대한 ‘남측’ 사회의 평균적 정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마음먹기로 한다면 사전에 충분한 공지와 합의와 약속을 주도면밀하게 해서 오로지 한반도기만 펄럭이고 ‘통∼일조국’만 넘쳐나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통∼일조국, 왠지 어색한…
그러나 그것은 불필요한 과장. 오히려 머리로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좀처럼 마음속에서는 우러나오지 않는, 왠지 어색한, 그러니까 ‘육화’된 함성으로 몸 속으로 터져나오는 함성이 ‘통∼일조국’이 아니었다는 점은 반성의 과제가 아니라 성찰의 계기로 값진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금강산이든 판문점이든 아직은 좀더 많이 만나야 한다는 점을, 그것이 축구가 되었든 농구가 되었든 앞으로 더 많이 겨뤄야 한다는 점을, 머릿속의 통일을 마음속의 통일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변증법의 제1원칙, 곧 ‘양질 전화의 법칙’, 그러니까 앞으로 더 많이 더 자주 만나고 겨루고 악수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대회였다. 그러니 ‘북측’의 대규모 선수단이 휴전선을 넘어 ‘남측’으로 오는 부산아시안게임에 거는 기대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