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우리는 무덤 위에 서 있다

죽이는 이야기- 한국사회 건설의 기초, 한국전쟁에서의 학살(1)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왜 내가 하필 이 문제를 붙잡고 골머리를 앓아야 하나 하고 후회할 때가 종종 있다. 머리로 이해하기 힘들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도 너무나 무거운 문제이고, 그렇다고 사료가 풍부한 것도 아니라면 사실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아니, 도망가려야 도망갈 데가 없는 경우도 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런 문제이다. 유족들은 호소한다. 학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부디 이 땅의 풀 한 포기 함부로 밟지 말아 달라고.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가족들을 가진 이들에게는 온 국토가 그들의 무덤이라고. 온 국토에 학살의 흔적이 널려 있고, 현대사의 거의 모든 사건이 학살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죽이는 모든 방법이 동원된 한국전쟁

참으로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때려죽이는 타살(打殺), 구살(毆殺), 주먹으로 쳐죽이는 박살(搏殺),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박살(撲殺), 격살(擊殺), 쏘아죽이는 사살(射殺), 총살(銃殺), 포살(砲殺), 칼로 찌르거나 베어죽이는 자살(刺殺), 찢어죽이는 육살(戮殺), 육시(戮屍), 생매장해 죽이는 갱살(坑殺), 바퀴로 치어죽이는 역살(轢殺), 단근질해 죽이는 낙살(烙殺), 밟아죽이는 답살(踏殺), 깔아죽이는 압살(壓殺), 독을 먹여죽이는 독살(毒殺), 껍데기를 벗겨 죽이는 박살(剝殺), 끓는 물에 삶아죽이는 팽살(烹殺), 불에 태워죽이는 분살(焚殺), 소살(燒殺), 베어죽이는 참살(斬殺), 여기서도 머리를 베어죽이는 참수(斬首), 허리를 끊어죽이는 요참(腰斬)이 있다. 또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익살(溺殺), 수장(水葬), 잡아죽이는 포살(捕殺), 굶겨죽이는 아살(餓殺), 목졸라 죽이는 교살(絞殺), 액살(縊殺), 채찍질하여 때려죽이는 추살(추殺), 철퇴로 쳐죽이는 추살(鎚殺), 몽둥이로 쳐죽이는 추살(椎殺), 발로 차죽이는 축살(蹴殺), 높은 데서 내던져 죽이는 척살(擲殺), 곤장으로 때려죽이는 장살(杖殺), 폭탄을 터뜨려 죽이는 폭살(爆殺),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죽이는 책살(책殺), 꾀어내어 죽이는 유살(誘殺), 죽일 사람이 없을 때 가족 등 다른 사람을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 등 인류의 역사에 있었던 사람 죽이는 방법이 모두 동원된 것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현실이었다.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고, 학살이 일어난 곳도 전국 방방곡곡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문자 그대로 죽은 자들의 뼈도 못추렸다는 것이다. 고양 금정굴에서, 지리산 외공마을에서는 일부나마 유골을 발굴하다가 쏟아져나오는 유골을 감당할 길이 없어 다시 흙을 덮어버렸고,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는 지금도 유골을 발굴중이다. 발굴된 유골의 신원을 확인하는 문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부끄럽게도 연구자들은 도대체 몇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지 가늠조차 힘들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만, 어쩌면 100만명이 ‘빨갱이’라는, ‘반동’이라는 손가락질 하나로, 심지어 그런 가족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한국전쟁은 20세기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 희생비율이 높은 ‘더러운 전쟁’이었다. 톱질을 하듯 전선이 이동한 한국전쟁은 무수한 민간인 학살을 낳았다. 전쟁 이전에 수만명이 희생된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의 참화를 비롯해서, 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과 좌익수감자들에 대한 학살, 노근리사건 등 미군에 의한 학살, 좌익과 인민군에 의한 학살,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학살, 국군과 미군에 의한 이북 주민들에 대한 학살,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남북이 각각 자기 지역을 회복한 뒤 ‘부역자’ 처단과정에서 이루어진 학살 등 학살의 목록은 끝이 없다.

“묻지마, 다쳐”의 사회

유엔이 ‘제노사이드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을 채택한 1948년 12월9일은 제주도에서 4·3사건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절정에 달했던 때이고, 이 협약이 발효된 1951년 1월12일은 함평에서 제3차 학살이 일어난 날이다. 제노사이드 협약을 채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다시는 안 돼”(Never Again)라는 구호를 외치는 그 순간 한반도에서 엄청난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만큼 제주는, 아니 한반도 전체가 학살을 감시하려는 인류의 양심과 이성의 눈길이 닿지 않는 외진 땅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한국전쟁은 흔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 불리는데, 그중에서도 학살은 잊혀진 전쟁 중에서도 가장 깊숙이 묻혀버린 사건이었다.

민간인학살 자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00만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모르는 척하거나 정말로 모른 채 반세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같은 하늘 아래 이런 엄청난 일들이 묻혀 있음을 애써 외면한 채, 또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상의 삶을 살아왔다. 수십만명의 죽음을 50년간 외면해온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학살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학살 은폐의 방조자가 됨으로써 사람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광범한 학살이 휩쓸고 지나간 이 땅에서 피해자도, 가해자도, 유가족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전체 구성원은 모두 사람일 수 없었다. 학살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우리가 다시는 이 땅에 학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연 학살은 한국의 사회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1960년대 초반 시인 김수영은 한국사회를 ‘에비’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평한 바 있다. 최근 한 휴대전화의 광고는 ‘묻지마, 다쳐’라는 카피를 사용하여 큰 히트를 했다. ‘묻지마, 다쳐’의 사회. 과연 우리는 무엇을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노령의 진보적인 어른들은 ‘똑똑한 사람들은 그때 다 죽고, 쭉정이만 남았다’라는 말을 하고, 군사정권 시절 ‘나서지 마라’는 부모들이 대학생이 된 자식들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이었다. 한국사회에 오랜 기간 군사독재가 유지되고, 또 군사독재가 물러난 뒤에도 반공주의, 보신주의가 횡행하는 것은 다 학살의 무덤 위에 한국사회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또 가족의 생존과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신가족주의나 살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가치관의 전도 역시 학살이 남긴 상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은 이렇게 한국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지배하고 있는 전도된 가치관의 해부와 청산으로 이어져야 한다.

양민학살과 민간인학살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에 관한 용어에서 한 가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학살을 ‘양민학살’로 부를 것인가, ‘민간인학살’로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에서는 관용적으로 양민학살이란 말이 쓰였고, 현재도 일반 언론은 물론 대다수의 유가족회와 일부 진보적 연구자들도 이 용어를 쓰고 있다.

원래 양민이란 용어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항일유격대원들을 ‘공비’라고 폄하하여 부르면서 이들이 친일주구배들을 청산한 것을 ‘공비들의 만행’인 ‘양민학살’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그런 용어가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학살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지게 된 것은 유가족들이 학살의 희생자들이 빨갱이나 통비분자가 아닌 무고한 양민임에도 불구하고 군경이나 우익단체에 의해 잘못 희생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자신들이 당한 억울함을 좀더 강력히 호소하기 위해 이 말을 계속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민학살이란 용어는 분명 문제를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양민학살이란 말은 빨갱이, 통비분자, 불순분자, 좌익가족들은 죽여도 된다는 가해자들의 논리가 갖는 부당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양민인데도 희생되었다는 특정 희생자 집단의 억울함을 부각시키는 데는 유리할지 몰라도, 당시 일반적으로 양민의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들, 이를테면 보도연맹원이나 좌익수감자들에 대한 학살을 자칫 정당화시킬 우려가 있는 용어이다. 모든 학살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학살은 괜찮고 어떤 학살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모든 학살은 다 나쁜 것이다. 설혹 빨갱이라 할지라도 그가 민간인이라면 국가권력이나 국가의 비호를 받는 무장집단이 한국전쟁 전후의 빨갱이사냥처럼 그런 식으로 마구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양민이란 말은 기본적으로 편을 가르는 말이다. 양민과 양민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학살의 첫 단계인 편가르기의 첫발을 뗀 것을 의미한다. 과연 민주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양민과 양민이 아닌 빨갱이, 통비분자, 불순분자를 구분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누가 누구에게 양민과 양민이 아닌 자를 구분하라는 권능을 부여했는가? 이름도 알 수 없는 유골 앞에서 그가 양민이었는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는가? 이 편가르기는 피해자들의 단결에 지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한 예로 동일지역 내에서 보도연맹원이나 좌익가족, 또는 ‘부역자’들과 이런 범주에 들지 않는 ‘양민’이 같이 학살당한 경우, 우리가 양민학살이란 용어를 고집할 경우 ‘양민’의 범주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죽음은 역사의 장에 설 자리조차 없다.

양민학살이 학살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살(誤殺), 즉 죽여야 할 대상을 고르는 데에서 잘못을 범한 것만을 비판하는 소극적인 개념이라면, 민간인학살은 국가권력이나 그 비호를 받는 무장집단이 비무장 민간인에 대해 일방적인 학살을 행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적극적인 개념이다. 민간인학살이란 개념은 또한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대부분의 학살사건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노근리는 하나의 사례일 뿐

1999년 9월 에 의해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은 학살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사건의 가해자가 미군이었다는 점은 한국전쟁의 신화와 아울러 마지막 성역을 깨는 것이었다. 노근리 사건은 실상 유가족의 한 사람인 정은용씨에 의해 소설 형태로 처음 알려진 이래 <말>과 <한겨레> 등에 의해 보도된 바 있지만, 대부분의 중앙일간지와 방송의 외면으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국내의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크게 보도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외신인 가 터뜨렸기 때문이다. 주류언론의 사대주의적 속성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노근리 사건은 이제 학살의 대명사처럼 되었지만, 이는 단지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수천건의 사건들이 아직도 숨죽인 채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국방부에서는 노근리 사건이 알려지고 난 뒤 민간인학살과 관련하여 1999년 10월20일부터 2000년 12월까지 민원을 접수하여 모두 64건을 신고받았는데, 이중 미군 관련 사건이 52건으로 단연 많고, 국군 및 경찰 관련이 11건, 캐나다군 관련이 1건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기간의 학살 중 미군에 의한 학살은 무차별 폭격으로 인한 학살을 포함하면 그 규모가 상당하지만, 대면학살에 국한한다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미군에 의한 학살 신고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아직도 국군 및 경찰, 그리고 우익무장대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기 때문으로밖에는 볼 수 없다.

천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공리 사건의 경우, 유골은 있되 유족은 나타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 기막힌 현실은 아직도 이 땅의 유족들이 겪는 공포와 체념의 벽이 얼마나 높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기 피붙이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 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야 했던 뒤틀린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그늘 아래 빨갱이 자식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야 했던 유가족들의 이야기야 어찌 무딘 필치로 제한된 지면에 담을 수 있으랴. 이 땅에 살기 위해 부모를 처형한 우익반공단체의 열성 간부가 된 아들의 심경을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노근리 사건으로 인한 학살의 공론화, 그리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한국사회의 민주화 분위기는 숨죽이고 살아온 유족들이 그동안의 한을 토로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물론 수십만명의 피학살자를 낳은 광범위한 학살에서 현재까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선 유가족들의 수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유족들이 나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 그래도 국민들에게 학살사건이 조금이나마 알려지고, 진상규명에 조금이나마 다가선 곳들은 예외없이 유족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곳이다.

<조선일보>사주 일가도 학살의 유가족?

민간인학살,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문제이지만 더이상 외면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유족들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언론과 연구자들의 관심 또한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민간인 학살문제에 대한 <조선일보>의 외면이다. 따지고보면 <조선일보>의 사주 일가도 넓은 의미에서 학살의 유가족 아닌가? 한국전쟁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계초 방응모 선생이 인민군의 이른바 ‘모시기 공작’에 의해 납북되어 가던 중 황해도 서흥에서 1950년 9월28일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임시정부 국무위원이던 김붕준 선생과 함께 희생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펴낸 방응모 선생의 전기는 납북장면에서 끝나고 있을 뿐이다. 납북해간 인민군만 죽일 놈들이고 정작 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전쟁 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공산군에 의해 처형된 것이 아니라 큰형님 나라 미국의 폭격에 의해 숨진 것이 당혹스럽기 때문일까? 할말은 하는 신문이 할말을 해주어야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