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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신비와 공포의 나라? 중국 지성계의 스타 왕리슝과 티베트 망명 사학자 체링 샤캬 사이의 뜨거운 논쟁
왜 야나기 무네요시가 떠오르나
그러나 야나기의 조선 미술관(觀)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미심쩍은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 야나기는 조선의 미를 ‘비애미’(悲哀美·슬픔의 아름다움)로 규정하고 조선인들을 ‘한의 민족’으로 봤다. 조선 민속미술의 익살스러운 활동성은 ‘가련하고 처량한 조선’의 그림을 그리려는 야나기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던 셈이다. 그 밖에도 그는 조선 미술을 ‘몰아(沒我)적인’, 즉 개인의 의장(意匠)이 아닌 전통 형식이 지배하는 것으로 개념화했다. 그의 서술에 담겨 있는 ‘개인이 없는 집단 위주의 사회’, ‘활동성과 기쁨이 결여된 미(美)’의 이미지는, 동양을 ‘단체주의적이며 피동적인’ 것으로 그려 ‘개인주의적이며 활동적인 유럽’과 대조시킨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양심적 지식인임에도, 유럽이 그 식민지들에게 덮어씌운 오리엔탈리즘적 이미지를 야나기가 거의 그대로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다 적용한 셈이다. 개인적 양심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제국의 담론에 의해 포획당한 식민주의 국가의 지식인으로서는 넘기 어려운 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배자 집단의 일원으로서는 식민지 민족을 동정 또는 동감할 수 있어도, 진정으로 동등한 역사의 주체로서 대접하기 어렵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금서가 됐지만, 해외 중국인들에게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에서 왕리슝은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중국의 운명이 매우 비극적으로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관료적인 중국 북부와 상업적인 남부의 내전과 미국의 개입, 수억명의 피난민 발생,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계적 핵전쟁과 지구적 규모의 참화는, 정치 판타지라는 장르의 백미로 꼽히는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중국 당국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발언으로 징역살이도 해본 왕리슝은 중국 민주화 운동가 사이에서 ‘티베트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티베트 자치의 확대를 주장하지만…
티베트에서 몇년 동안 살고 티베트 각계각층의 인물들과 가까운 관계를 가진 왕리슝은, 중국 정부에게 독립에 준하는 티베트 자치의 확대에 따른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와의 화해를 촉구해 시선을 모았다. 중국이 선수를 쳐서 티베트의 독립운동에 대대적인 양보를 하지 않는 한 중국을 포위하여 분리시키려는 미국이 티베트 독립 문제를 이용하여 중국의 분열을 획책할 수 있다는 것은 왕리슝의 경고다. ‘친티베트 인사’로 알려진 그인 만큼 <뉴 레프트 리뷰>에 쓴 그의 글이 크게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다. ‘양심적 지식인’의 명성에 걸맞게 왕리슝은 중국의 관용(官用) 학자들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많은 사실들을 인정한다. 청나라 시절에 티베트가 조공 국가였지만, 중국이 내정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는 왕리슝의 주장은 “청나라가 티베트에 대한 영유권을 확고히 했다”는 중국 정부의 입장과 매우 다르다. 1950년 4만명의 중국군이 티베트로 진출한 것이 ‘해방’이 아닌 무력 점령이었다는 것도 왕리슝은 인정한다. 달라이 라마와 10만명이 넘는 승려와 속인의 망명으로 끝난 1959년 대대적인 독립투쟁에 대해서도 왕리슝은 애써 객관적인 서술태도를 보이려고 한다. 1960년대의 ‘근대화 개혁’ 과정에서 사원(寺院)의 97%가 폐쇄·파괴되고, 승려의 93%가 강제 환속을 당했다는 사실도, 1967~70년에 티베트 인구 약 10%가 ‘반동’의 누명을 써 투옥·총살됐다는 사실도 그는 그대로 인정한다.
티베트 민족운동에 대해 그 정도로 개방적인 왕리슝이지만, 그의 텍스트를 읽으며 한 가지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가 티베트를 동정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티베트의 문화·종교를 대단히 이국시·이질시하면서 티베트를 ‘신비롭고 비(非)문명적’인 공간으로 서술한다. 예컨대, 그가 티베트의 불교를 ‘인과응보에 대한 무한한 공포의 종교’로 보고, 라마(승려)들에 대한 티베트 사람들의 존경심에 대해 “라마의 말에 불복함으로써 지옥에서 다시 태어나게 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라마들을 신통력을 가진 초인(超人)적 존재로 인식하여 두려워한 티베트인들이 라마 집단이 중국 군대에 의해 궤멸되는 것을 보고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을 달라이 라마와 똑같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새로운 부처’인 마오쩌둥의 지시대로 ‘문화혁명’ 때 사원을 파괴하면서 이 행위에 의해 악업(惡業)이 생긴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은근히 가졌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공산당이 사원들의 일부를 복원하고 문화혁명 시절의 티베트인 활동가들을 강등시키자 티베트인들이 이 현상에서 ‘인과응보’ 원칙을 확인하여 다시 한번 달라이 라마와 승단(僧團)의 신비스러운 권력에 귀의했다는 것은 1980년대 불교 부활에 대한 왕리슝의 설명이다.
티베트-중국 진정한 화해는 어려울 듯
결국 야나기가 일본의 식민지 조선을 ‘슬픔과 몰개성’의 나라로 본 것처럼, 왕리슝은 중국의 식민지 티베트를 ‘신비와 공포’의 나라로 본다. 두말할 것 없이 “신비롭고 공포감에 찼다”는 것도 서구인들이 ‘합리적인 서구’와 대조되는 ‘오리엔트’(동양)에 대해 많이 써온 언설이다. 티베트를 이국화한 왕리슝의 글에 대해 체링 샤캬가 <뉴 레프트 리뷰>의 제15호에서 예리한 반론을 폈다. 체링 샤카는 중생들에게 세속의 고통에 대한 무외(無畏·겁 없음)를 선사하여 그들을 해탈로 인도한 부처의 종교가 ‘공포의 종교’로 서술되면 안 된다고 논증한다. 왕리슝은 인과응보의 원칙을 ‘내세에 대한 공포’에 의거한 것으로 폄하하지만, 그것은 현세 행동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 원칙일 뿐임이 체링 샤캬의 논지다. ‘낙후된’ 티베트의 종교를 신비화하는 왕리슝이 본의 아니게 불교가 성행해 인과응보를 대중적으로 믿은 중국 과거에 대한 현대 중국 지식인들의 무지와 진지한 관심의 결여를 그대로 드러냈다는 것도 체링 샤캬의 또 하나의 지적이다. 체링 샤캬를 경악하게 한 것은 문화혁명 때 중국 공산당의 사주에 의해 사원들을 파괴한 극소수 티베트인들의 소행을 왕리슝이 마치 ‘무력한’ 달라이 라마에 대한 신앙을 잃어 대다수 티베트인들이 마오쩌둥을 ‘새로운 공포의 신’으로 받든 것처럼 묘사했다는 점이다. 체링 샤캬는 여러 사례를 들어 1960~70년대에 대다수의 티베트인들이 비밀리에 불교 신앙을 그대로 간직해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체링 샤캬는 1980년대 이후 티베트인들의 민족운동을 마치 “불교 신앙의 갑작스러운 부활에 의한 종교운동”처럼 묘사하는 왕리슝의 입장의 부당성을 논박한다. 티베트를 후진시하려는 중국 지식인들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달라이 라마를 민족 지도자로 내세우는 티베트 독립운동이 이미 근대적인 민족주의로 발전됐다는 것이 체링 샤캬의 결론이다. 중국·티베트 지성인 사이의 최초의 자유로운 논쟁인 왕리슝-체링 샤캬 간의 2002년 논쟁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한국과 일본의 경우도 그렇듯, 티베트와 중국 사이의 진정한 화해가 매우 힘들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을 듯하다. 가령 티베트가 독립이나 독립에 준하는 자치권을 얻게 될 것이라 해도, 현재 티베트에 대한 중국 지식인의 태도로 봐서는 중국이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해서 사과·배상을 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식민지 시절의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일본 우파의 억지주장 못지않게, 중국쪽도 1950년 이후의 티베트의 식민화를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계속 합리화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티베트로서 상당히 비극적인 이 상황에서는,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미 침략의 고배를 마신 한민족인 만큼 지금 같은 비극을 겪고 있는 티베트에 대해 관심을 갖고 티베트 인권운동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한다. 박노자 ㅣ 오슬로국립대 교수·<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자료링크●
티베트 망명정부 공식 사이트 http://www.tibet.com/ 티베트에 대한 왕리슝의 온라인 에세이집 <톈짱>(天葬)http://www1.chinesenewsnet.com/Serial/Serial1/index.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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