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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해야 하는 ‘명백한 운명’ J.L.오설리번의 궤변으로 이론화된 미국의 선민의식, 멕시코 전쟁에서 이라크 공격까지
8월 중순에 놀라운 통계를 접한 일이 있었다. 미국인 69%가 이라크 공격을 지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였다. 이미 걸프전쟁 때 미군에 의해 약 20만명의 이라크인들이 학살되었고, 미국이 주도한 살인적인 경제제재 결과로 100만명 이상의 이라크인들이 비참히 죽었음에도 또다시 대량 살인을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광기’의 상품이 팔리는 조건
물론 이유는 한둘이 아니다. 무기를 팔아먹어야 사는 군산복합체와 경기 침체에 따른 노동쟁의 증가를 우려하여 ‘국민 통합’을 필요로 하는 주요 재벌들의 사주를 받아 일체 아랍인들을 “우리를 위협하는 테러 집단”으로 묘사하는 미국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슬람 근본주의의 위협’에 대한 선동적인 보도로 신문과 방송을 메우는 그들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멀쩡한 사람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와 전혀 무관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미국을 위협한다는 망언을 믿을 수 있었겠는가? 제도권 교육이 만들어놓은 그릇된 역사인식이 뒷받침하는 정통적인 인종주의도 호전적 여론의 고조에 한몫한다. 아시아·태평양에서 패권을 놓고 벌인 태평양전쟁에 대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정전(正戰)’이라고 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히로시마·나가사키 등의 원자폭탄 투하라는 인종주의적 대학살을 ‘전쟁 논리상 불가피한 일’로 인식한다. 원자폭탄 투하는 적어도 인식이라도 하지만, 6·25전쟁 때 북한지역에서 수십만명의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인 ‘융단 폭격’이라는 인종주의적 학살에 대해서 아는 비전문가는 거의 없다. ‘베트남 신드롬’이라는, 미국에서 잘 알려져 있는 용어는 400만명 이상의 베트남인 학살에 대한 죄책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열등 인종’의 손에 ‘천하무적의 미국’이 패배당했다는 ‘자존심의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와 제도권 교육 같은 ‘허위의식 확대재생산의 기계’들이 다 가동된다고 해서 살인적인 광기라는 상품이 무조건 잘 팔리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강한 긍정적인 의식이 잠재적 구매자 사이에 뿌리박혀 있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 이 조건이 잘 충족된다. 왜냐하면 백인이나 백인들과 유착된 비(非)백인 상류층 미국인들을 하나의 ‘상상된 공동체’인 ‘국민’으로 만드는 통합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이미 대외전쟁의 합리화 의식을 강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1840년대부터 어느 정도 체계화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사회적 의식을 의미한다. 앵글로색슨 계통 백인의 상류층에 의해서 만들어진 ‘명백한 운명’의 논리는, ‘후진적 외부인’이라는 ‘타자’를 설정해놓고 그 ‘타자’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미국 국민”이라는 우월심과 적개심을 고취함으로써 미국사회 내의 계급갈등을 무마하여 호도하려고 했다.
‘선인’ 자리에 ‘미국 국민’이 들어서다
‘명백한 운명’ 이야기가 1840년대에 처음 나왔을 때, 그 직접적인 문맥은 그때의 현안인 텍사스 병합(정확하게 멕시코 영토의 약탈)의 문제였다. 1820∼30년대에, 미국 동부 내의 무산계급이 형성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국 상류층은 영세농민 등이 멕시코 소유의 텍사스로 이주하기를 적극 장려했다. 이주자 중에는 빈민도 많았지만, 흑인 노예를 많이 데려오는 남부 농장주인도 꽤 있었다. 흑인 노예 소유를 금지한 멕시코의 법에 불만을 품고 멕시코인들을 ‘열등 잡종’으로 간주한 그들은 결국 1836년 ‘독립’을 선언하여 노예 소유가 허용되는 미국으로의 ‘병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가 그들을 지지하면 멕시코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전쟁에 대한 논의가 가열돼가는 1845년 유력지 <데모크라틱 리뷰>의 주필이던 J. L. 오설리번(1813∼95)은 7, 8월호에 미국 국민의 ‘명백한 운명’에 대한 그의 명(名)논설을 게재한다. ‘명백한 운명’의 이데올로기가 체계를 갖춘 시점은 바로 그때였다.
첫 승리와 노예주들의 새로운 꿈
미국의 ‘위대성’에 대한 미사여구가 백인 우월주의적·팽창주의적 궤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원주민을 학살·강제 이주시키고 흑인 노예를 부리는 자들에게도 ‘양심’이 존재하는가? 남의 영토를 빼앗으면서 자국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 ‘진보’인가? ‘명백한 운명’의 기만성은 근거도 없는 미사여구 그 자체가 아니다. 대다수 피착취 백인까지도 ‘신의 선택을 받은 선민’으로 설정한 대신 그들에게 영토팽창, 대외전쟁의 의무와 권리를 부여했다. 그 뒤 각종 매체에 의해 거론되고 학교 교과서의 일부분이 돼버린 ‘명백한 운명’ 담론의 독약은 바로 다음에 있다. ‘우리’ 사이에 실재하는 계급 갈등은 호도되고, ‘선택받은 우리 모두’가 제국주의 범죄의 공범이 된다. 현재 부시의 대이라크 전쟁을 지지한다는 대다수 우민(愚民)들의 뇌리에 바로 이 ‘명백한 운명’의 논리가 새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선택받은 우리’에 의한 대량 학살은 ‘억압받은 자와 인권과 신의 원칙’을 위한 ‘정전’(正戰)으로 오해되는 것이다. J. L. 오설리번이 ‘신’과 ‘인권’과 ‘양심’을 들먹이며 요구했던 멕시코 침략(1846∼48)은 결국 무기와 조직이 우월한 미국의 승리로 끝맺었다. 성공적인 약탈의 결과로 멕시코 영토의 거의 절반(텍사스와 캘리포니아)이 미국에 편입되었다. 최초의 ‘영토팽창 전쟁’의 승리는 미국 노예주와 자본가들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주었다. ‘멕시코 전체 병합’, ‘쿠바 정복’ 요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국사회는 대외침략이라는 ‘마약’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전쟁 중의 ‘애국심의 붐’, ‘명백한 운명’ 이론의 인기는 미국 지배층에게 대외전쟁을 통해 내부적인 갈등들을 호도할 수 있다는 충분한 기대를 심어주었다. ‘명백한 운명’의 담론으로 장식된 미국 침략주의는 그렇게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경제·사회적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미국 지배층은 언제나 ‘침략주의 담론’이라는 그들의 전가의 보도를 다시 들게 된다. 언제 터질지 모를 이라크 침략이나 또 다른 미래의 침략전쟁에서 미국이 베트남전 이상의 대패를 맛보거나 미국의 민중의 대오각성하지 않는 한, ‘명백한 운명’ 논리에 의거한 피비린내나는 학살의 불행한 역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박노자 ㅣ 오슬로국립대 교수·<아웃사이더>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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