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북유럽탐험] 양심의 권리가 더 신성하다

징집대상자 중 10%가 ‘대체봉사’ 택하는 노르웨이, 그것조차 거부하는 ‘완전거부자’들도

서구적 근대성을 말할 때, 여러 가지 ‘보급’이나 ‘보편화’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통설이 된 지 오래다. 문자 보급과 고등 교육의 보편화, 유럽 특유 전염병들의 전세계적 보급과 설탕·담배의 유럽에서의 보편화, 참정권의 전례없는 확산과 정치운동들의 보편화…. 그러나 국가 권력의 고도화와 강화, 그리고 ‘국민국가’ 이념의 보급으로 인해서 보편화된 또 한 가지 현상은, 바로 국가의 합법화된 조직적 폭력, 즉 군복무였다.

‘유럽적 민주주의’와 ‘병역거부권’은 동의어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전까지 소수의 귀족 장교와 천민 취급을 받는 평민 졸병의 몫이었던 군복무는, 19세기에 와서 일체 ‘국민’의 ‘신성한 의무’로 탈바꿈하였다. 국민개병제도의 확산에, 1816년부터 군복무를 의무화시킨 노르웨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별다른 전쟁을 하지 않았던 스웨덴과 합방돼 있었던 노르웨이는, 징병제를 상당히 ‘부드러운’ 방법으로 실시할 여유를 가졌다. 자연 여건이 어려운 북부지역의 주민 전원이 면제되고 대부분의 도시민들이 면제나 갖가지 특혜를 받은데다, 실제 복무에는 제비뽑기로 선발되는 소수의 인원만이 들어갔다. 이와 같은 ‘부드러운’ 체제는, 유럽에서 군국주의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20세기 초까지 존재해왔다. 그러나 노르웨이식 국민개병제도의 융통성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신성한 군복무의 의무’에 반기를 든 사람들은 많았다.

살생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예수의 가르침이 신성하고, 팽창해 가는 국가가 개인의 종교적 양심을 유린한다고 믿었던 퀘이커(Quaker)와 같은 종교 소수자들은, 군복무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살생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그들은, 그리운 고향을 버려 미주로의 이민을 택하는 서러움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내면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는, 자본가들의 이득만을 챙겨주는 국가를 위해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들의 피를 흘리게 할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었던 일부 사회주의자들도 반(反)군복무 운동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었다. 결국 예수와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르웨이 땅에서 유럽적 근대성의 가장 부정적인 측면인 ‘국가적 폭력의 보편화’가 어느 정도 견제되어, 민주적·인권적 근대의 모습이 지켜졌던 것이다.

노동당과 공산당의 끈질긴 노력으로 드디어 1922년에, 양심적인 병역 거부를 허용해주고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는 최초의 법안이 노르웨이 국회에서 채택됐다. 이 법안 채택의 배경에는, 국내 반(反)군복무 운동의 성과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분발한 평화주의자들의 열띤 투쟁의 결과로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 등지에서 통과된, 대체봉사 관련 법률의 영향도 있었다. 사실 대체봉사제도를 가장 늦게 법적으로 인정한 프랑스(1963), 벨기에(1964), 스위스(1996)만 제외하고는, 이미 1920∼30년대에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권은, 유럽 대부분의 민주법치국가에서 보편화됐다. 사실 그때부터 병역거부권의 존재 여부는 민주 법치 수준의 주요 기준으로 인식되기 시작됐다.

인권에 문제가 많았던 동독마저도 1964년부터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기준에 의해서 ‘민주국가’로서의 공인(公認)을 받아야 했던 필요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문맥에서, 병역거부운동의 선봉에 섰던 유럽 노동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초기의 소련도, 상당히 오랫동안(1939년까지) 적어도 법률상 종교 신념에 의한 병역 거부권을 인정했다. 한마디로 1920∼30년대부터 노르웨이를 포함한 대다수의 유럽 민주국가에서 ‘유럽적 민주주의’와 ‘병역거부권 인정’은 동의어로 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쟁중에도 병역거부권 쟁취투쟁

현재로서, 통계상 1년에 징집되는 젊은이들의 약 10%는 16개월(정상적 병역기간의 거의 2배)의 대체복무를 택한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 봐서 대학생 중 거부의사자의 비율이 거의 절반에 달한다.

복무의 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중·고등학교에 학생간의 싸움을 방지하는 상담 요원으로 파견되어 자신의 반(反)폭력적 신념을 실천적으로 살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좌익계 거부자들이 아동구조·대외원조 기구에 취직하여 세계적 불평등 구조를 조금이나마 고치려는 자신의 의지를 실천에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와의 이와 같은 타협까지도 뿌리치고 ‘완전거부’의 어려운 길을 택하는 사람들도 1년에 100∼200명이나 된다. 자신의 신념과 어울리는 복무까지도 안 하겠다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말을 한국에서 하면 ‘배부른 사람들의 장난’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전거부자’(total objector)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보면 일리가 상당히 있어보인다. 그들은 병역의 근거인 국가의 ‘국민 동원권’ 자체를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국가가 국민에게 일정기간의 군복무나 대체봉사를 강요한다는 것은, 고대 유럽에서 노예주가 노예를 부리거나 중세 동양사회에서 전제군주가 백성을 토목 공사에 징집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는 반(反)민주적이고 반(反)인륜적인 폭력이다.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폭력과 타협해서 편안한 대체봉사의 길로 간다는 것은, 폭력의 공범(共犯)이 되는 수치와 다를 것이 없다. “힘에 굴종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란 말은 그들의 표어다. 그러면 국가의 힘에 굴종하지 않는 대가는 보통 무엇인가?

1993년의 새로운 법에 따르면 ‘완전거부자’는 90일의 구류를 당할 수 있다(특별한 경우에는, 180일간의 구류도 가능하다). 그리고 물론, 전과자가 된 그들은 나중에 공무원으로서 출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불이익을 각오하고 국가와의 정면 충돌을 선택한 그들의 감옥 체험담과 법률 조언들을, ‘완전거부자’ 협회의 공식 웹사이트(http://pluto.wit.no/doogie/ga/huset/kmv/)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신념을 같은 평화주의자 사이에서도 일종의 극단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국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운동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노르웨이 진보운동 전체에 대단히 다행이라고 노르웨이인들은 생각한다. 타협과 안주를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최근에 대체복무제도의 장기적인 정상 운영으로 만족과 침체에 빠진, 노르웨이의 반전(反戰) 반(反)폭력 운동의 생명과 활력이 유지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최초의 대체복무법(1916년)을 쟁취한 영국의 평화주의자들은, 냉전도 아닌 열전(제1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군복무를 거부하여 영창에 끌려가곤 하였다. 지금도 그리스와의 대치 속에서 쿠르드족과의 사실상의 교전 상황에 있는 터키에서는, 일부의 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이 군복무를 거부해 재판을 받고 있다. 결국 아직까지도 대체봉사법이 없는 터키에서 이 법이 채택된다면, 지금과 같은 ‘전쟁 속의 병역거부운동’의 결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사적 파시즘이 이미 일상화된 군국주의 국가 이스라엘에서도, 아랍권과의 끝나지 않는 대치 속에서도 극소수 양심 분자의 병역 거부 투쟁은 끈질기게 지속된다. 그 결과로, 대체봉사제도가 이미 부분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렇다면, 국가간의 대치 상황이나 전쟁은 대체근무제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 제도의 쟁취를 위한 투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한국에는 왜 아직도 없는가

그러면 한국에는 아직 대체봉사제도가 없는데, 이 제도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진보진영에서조차 희미한 근본적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보통 이와 같은 질문을 한국 지식인에게 하면 ‘전통적인 국가주의’를 탓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전통 시대의 말기에 조선 천주교 신도들이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자기 희생의 정신을 보여, 양심의 자유를 위한 비폭력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던가? 개인의 양심과 신념보다 ‘국가적 필요성’이 한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군사적 광기가 짙었던 일제 말기의 ‘국민 총동원’ 시기다. 태평양전쟁 시기의 군국주의적·국수주의적 세뇌의 장치들을 남·북한의 정권이 각각 그대로 이어받아 “국가를 위한 살생도 종교적·도덕적 죄”라는 단순한 논리조차 생기지도 못하게 국가와 군대를 이전의 일본 천황과 같은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만들어놓았다. 지금 한국의 반(反)군복무 운동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은, 남북의 분단과 대치 자체라기보다는, 남·북한 정권의 많은 공통점 중의 하나인 일제식 세뇌장치의 무분별한 이용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노르웨이 반(反)군복무 운동의 ‘쌍두마차’를 이룬 것은, 예수의 살생 금지를 실천하려는 일부의 기독교인과, 계급 국가를 불복종하려는 일부의 좌파였다. 한국의 경우에는 극우반공체제 상황에서 좌파 운동이 상상을 초월하는 탄압을 받았고, 대부분의 주류 종교 집단들은 일제시대의 전례대로 국가와의 전면적인 타협을 하거나, 혹 독재국가와의 충돌을 한다 해도 ‘신성불가침한’ 안보·병역의 영역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각종의 터부들이 점차 무너져가고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세뇌의 메커니즘이 본격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양심과 엇갈리는 국가의 요구를 거부할 권리도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의 수는 점차 많아질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