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박노자 교수의 북유럽 탐험 등록 2001.09.19(수) 제377호

[박노자의 북유럽탐험 테러와 복수의 ‘적대적 공생’

입지 강화된 미국 극우 세력… 빈 라덴도 분노의 결집을 위한 대량보복을 기다린다

미국에서 이번의 대참사가 발생한 뒤 필자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노르웨이 친구나 동료들의 일상이 눈에 띄게 변했다. 보통 때처럼 웃고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최근 며칠 사이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표정이 시무룩해지고, 이야기의 주제는 저절로 미국에서의 이번 일로 모아진다. 세상이 이미 근본적으로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크게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차후에 매우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예감을 거의 다들 공유하는 듯한 분위기다.

그것은 ‘진보’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은 모두에게 억울함과 고통을 안겨준다. 화염 속에서 사라진 생명들, 빌딩의 폐허 밑에서 오랜 고통 끝에 숨진 생명들의 마지막 순간은 상상하기조차 무서울 정도다. 이들 유족의 절망과 영원한 이별의 고통이 지금 비로소 시작될 뿐이다. 그 수많았던 생명들의 신음과 절규들을 생각하면 이 일을 더이상 논평할 마음도 기력도 사라진다. 사연과 이념이 무엇이든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악이라는 말밖에, 더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는가?

좀더 생각을 편다면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반 직장인과 노동자였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사무원, 청소부, 소방관, 조종사와 승무원….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노동 현장을 지켰던 그들이 죄없이 고통스럽게 숨진 것은 끝없이 억울한 일이다.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집단이 누구라 해도, 무고한 생명들을 고의적으로 희생시킨 그들은 분명히 진보의 편에도 사회의 약자의 편에도 설 수 없다. 테러집단의 목적이 추상적인 ‘미국 위세의 상징’에 대한 공격이었겠지만, 희생된 사람 중 상당수가 중동과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지 출신이었다. 그 테러집단이 ‘미국의 죄’를 추궁한다 해도 무관한 이들까지 왜 ‘마구잡이’식으로 죽여야 했을까? 죽은 사람 중에서 유아·청소년들도 많이 있었을 텐데,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체류하는 ‘죄’밖에 없는 그들까지도 미국이라는 국가를 공격하는 집단의 표적이 되어야 하는가?

사실 ‘국가의 죄’를 그 국가의 영토 안에 있는 정부와는 무관한 민간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가장 끔찍한 국가주의적·집단주의적 발상 중의 하나이다. ‘진보’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성한 생명의 권리를 가진 개인과 국가라는 통제 체제를 제대로 구별하여 특정 국가에 대한 원망을 개인에게 풀지 않는 것일 때 의미가 있다.

무고한 생명의 죽음이 비길 바 없이 억울한 일이라면, 그들 뒤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과제는 어디까지나 더이상의 어리석은 참사를 방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바로 이 대목이 현재로서 아주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르웨이를 포함한 전세계 진보적 매체들이 이미 누차에 걸쳐서 지적한 바지만,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추측되는 집단에 의해서 자행된 이번의 참사는 분명히 부시 정권을 비롯한 제1세계의 극우·군국주의 세력들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다. 한 극단의 반인륜적인 행동이 반대쪽 극단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적대적 공생’의 논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북한의 극좌세력과 남한 극우세력의 관계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북한 정권의 소행으로 판명되거나 추측되는 극단적인 폭력행위들이 남한 극우들의 정치적 생명을 많이 늘렸다는 것이 잘 기억할 수 있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테러행위 배후조직의 계산

이 비극적인 악순환이 지금 전세계적인 규모로 되풀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번 일을 핑계삼아, 부시 정권이 미사일방어체제 등의 무모한 계획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은 이미 정권 관계자들의 발언을 통해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이번 참사는 결속력이 강한 테러집단이 미사일도 없이 거의 ‘맨손’으로 미국 수뇌부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가 무용지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미국 전역의 호전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전 국민적인 극우적 동원 풍토를 조장하고 있는 현 부시 정권은, 군산복합체를 더욱더 살찌울 수 있는 마당에 실제적인 효과성을 깊이 고려할 리가 없을 듯하다. 일단 명분이 주어지고 여론몰이가 쉬워졌으니 좀더 힘차게 밀고 나갈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 결과로 중국과 북한, 그리고 이라크, 시리아 등의 중동의 반미적 정권들의 연대는 좀더 강해질 것이고, 그 연대는 역시 미국 국방예산 증가의 새로운 명분으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양극의 상호 자극의 궁극적인 결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이와 관련해서 이번 일로 심적인 위축과 좌절감을 면치 못한 서방의 진보진영은 그러나 미국 군산복합체의 실체와 군국주의의 위험성을 설명하고 반대하는 노력을 한시라도 쉬면 안 될 것이다.

미래의 갈등을 촉발할 수 있는 미사일방어체제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는 위협은 부시 정권 관계자들이 수시로 들먹이는 ‘보복 공격’이다. 노르웨이 좌익신문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 추측하는 바와 같이 미국의 대량 보복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이번 테러행위 배후조직의 계산이라고 보인다. 예컨대 미국이 보복으로 테러 배후인물로 추측하는 빈 라덴이 체류하는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다면, 이 행위는 탈레반 정권과 빈 라덴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한편, 미국 공격으로 인한 희생자들의 유족을 비롯한 수많은 아프간 사람들을 빈 라덴의 추종자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빈 라덴이 가장 바라는 바가 미국의 군사적 행위에 대한 아랍권의 대대적 분노, 반미·반이스라엘 분위기의 유발이라는 것은 노르웨이의 진보진영 관측자들의 의견이다.

러시아군에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체첸 마을에 대한 러시아군의 보복공격을 유발하고, 그 공격의 참상을 목격하거나 가족을 잃은 체첸 사람들의 빨치산에의 입대를 유발하는 체첸의 빨치산 독립군의 전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발상인 것이다. 그렇다고 과연 미국이 꼭 아랍진영 일부와의 소모적인 장기전에 들어가야 하는가? 미국 극우주의자들에게 전쟁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겠지만 미국의 민중에게도, 전쟁에 협력해야 할 다른 나토 가입 국가(노르웨이 포함)들의 민중에게도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시나리오다.

“가장 급한 대책은 제3세계 빈곤해소”

다행히 노르웨이 현 노동당 정부의 국무총리와 외무부 장관은 “노르웨이가 보복전쟁에 꼭 참여할 계획은 없으며, 그러한 테러의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가장 긴요한 대책은 제3세계의 빈곤해소”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물론 지금과 같이 격앙된 분위기에서 쉬운 일이 결코 아니지만 부시 정권의 군사적 모험을 막는 것은 노르웨이를 포함한 모든 서방 진보진영의 급선무이다. 사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자살 테러를 전쟁으로 억제할 수도, 섬멸할 수도 없다는 것은 정세 분석가가 아닌 일반인들도 알 만한 일 아닌가? 아랍권을 비롯한 제3세계의 생활여건이 나아지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과 탄압이 중지되는 등 객관적인 상황이 호전되면, 반미기류나 테러를 가능하게 하는 분위기도 수그러질 수 있겠지만, 특정 아랍/이슬람 국가를 미사일로 폭격한다고 해서 과연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미국을 해치고 싶은 자살 테러리스트 후보자의 수가 줄어들 것인가?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미국의 극우적 정권이 지금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대(對)아프간 공격이 궁극적으로는 한국 경제·정치의 전망에 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지금 미국이 계획하는 아프간에 대한 대대적 육로공격은 대량의 민간인을 희생시킬 것이 분명하고, 이는 걸프(Gulf) 산유국 정세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많다. 지금도 빈 라덴의 테러단체가 암암리에 빈 라덴의 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보수적 종교계의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기에, 빈 라덴을 추적하는 미군들이 이슬람 신도인 민간인들까지 희생시킨다면, 그뒤 걸프 국가들의 이슬람 지도자와 대중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 경우 보수적 종교계의 거부감을 많이 사는 걸프 국가들의 현재의 친미적 정권들도 결코 무사할 리가 없을 것이다.

걸프 지역에서 대규모의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면, 큰 폭의 유가 상승이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면 걸프 석유에 의존하는 한국·일본의 경제에 70년대의 ‘오일 쇼크’보다 훨씬 심한 타격이 가해질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전쟁을 치르면 북한문제에 대해 훨씬 강경한 입장에서 접근할 것도 결국 남북관계 발전의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은 물론이다. 상황을 이와 같은 각도에서 보면, 우리가 미국의 전쟁준비를 단순히 인류박애의 인본주의적 입장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국익의 입장에서도 분명히 반대할 근거가 있다.

미국내 중동 출신 박해받을라

현재 극우·주전(主戰) 일색의 분위기로 돌변한 미국이, 또 한 가지 함정에 쉽게 빠질 가능성이 많다. 다름이 아닌 이미 500만명이 넘는 미국 내 이슬람 신도, 중동 출신의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그것이다. 미국 당국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선량한 대다수의 중동 이민자”와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들을 구분하여 미국인들의 관용과 자제에 호소하지만, 이슬람 신자와 중동 계통의 이민자들에 대한 산발적인 공격과 구타, 살해 위협과 건물 방화 등이 이미 미국의 전역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어쩌면 이성을 마비시키는 광적인 ‘총동원’ 분위기와, 제대로 극복도 반성도 되지 못한 수백년 동안의 인종차별 ‘전통’의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문제는 지금 계획되는 바대로 미군의 육군부대까지 대(對)아프간 공격에 투입되면, 장기적으로 미군의 상당한 인명손실이 불가피할 것이다. 약 10년 동안의 대(對)소련 게릴라전쟁과 그뒤 10여년간의 내전 속에서 단련된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 병사들이 미군에 쉽게 굴복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동사람에 의한 미군의 인명손실이 발생할수록 이에 분개한 미국인들에 의한 중동 이민자의 무차별적인 공격도 크게 우려된다. 그리고 미국인들의 오랜 인종차별의 ‘콤플렉스’가 부활하면 그 피해자가 중동인만이 아니라 일체 아시아 이민자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도 악화될 우려가 적지 않다. 그 결과로, 아무 죄도 없이 거리에서 폭력을 당하는 중동인들의 일부가 테러리스트 대열에 가담할 가능성과 결국, 미국 땅에서 증오와 폭력의 악순환이 지속될 가능성도 많다. ‘미국 내의 작은 중동’, 즉 미국 전역에 산재한 중동 계통의 마이너리티 인권보호의 입장에서도, 미국의 극우파 지도자들의 주전론을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한다는 것도, 북유럽 좌익의 중요한 시국 주장 중의 하나다. 다행스러운 것은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와 달리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한 유럽에서는 빈 라덴의 극우적 테러집단과 중동인 전체를 동일시하는 마녀사냥식의 분위기는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인접한 이유로 러시아 관계에 언제나 주의를 돌리는 노르웨이의 신문에서는 이번 사태의 한 가지 흥미로운 결과 중 하나가 바로 미-러관계의 급속한 진전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아프간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기 위해서 미국은 아프간에서의 무자비한 침공을 1980년대에 감행한 바 있는 러시아의 정보와 군사적 경험도, 아프간과 인접한 타지크 공화국에서의 러시아군대의 기지도 절실히 필요로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체첸 독립군을 지원해온 빈 라덴의 조직과 탈레반 정권을 주요 ‘골칫거리’로 인식하고 있는 러시아도 미국에의 협조를 완전히 거절할 리가 없을 것이다. 러시아가 이라크·시리아와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고려해서 나름대로 자제한다 해도, 상당한 정도의 대미 협력을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에 여태까지 러시아 군대의 체첸에서의 만행·학살·인권침해문제를 거론해왔던 미국 당국과 주요 매체가 러시아의 반감을 사기 쉬운 이 주제를 완전히 ‘삭제’할 수 있다.

미국이 체첸말살 눈감아준다?

사실, 벌써부터 수많은 미국 매체에서 러시아의 체첸 침략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글들을 접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여태까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여론을 의식해서 체첸에서의 극단적이고 가시적인 의도적 학살행위들을 어느 정도 삼가려고 노력해왔던 러시아군대 지도부가 아예 노골적인 민족말살정책을 채택할 위험성이 아주 크다. “체첸의 저항을 무찌르려면 민족 구성원들을 전체적으로 말살하거나 분산시켜 강제 이주시켜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러시아 장교 사이에 오래 전부터 나돌았는데, 미국의 반응을 더이상 의식할 필요없는 상황에서라면 이는 쉽게 현실로 옮겨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래서 체첸 지역에서의 인권문제를 걱정하는 노르웨이의 인권운동가들은 무엇보다도 반전운동의 필요성을 좀더 강하게 표현한다.

제1세계의 극우인 부시와 제3세계의 극우인 빈 라덴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무자비한 전쟁이 전세계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키리라는 것은, 현재 노르웨이 지식인들의 종합적인 상황 판단이다. 지난 9월11일의 테러가 끔찍했지만, 미국의 무리하고 반(反)이성적인 반응은 훨씬 더 끔찍한 사태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 방지의 유일한 대안은, 제3세계의 빈곤의 해소와 제3세계의 주요 피압박 집단들에 대한 이해증진과 인권보호를 골자로 하는 포용과 관용의 방침이다. 복수에 더 큰 복수로 응답한다면 고통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모든 종교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가르침을 실천하는 반전운동가들과 평화주의자들이 현재의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그런다 해도 과연 미국 국민의 동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매우 부정적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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