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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북유럽탐험] 일상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 사회민주주의의 생활습관과 윤리가 돋보였던 스칸디나비아의 첫 인상에 관하여
노르웨이에 온 첫날부터 오슬로 시내에서 왔다갔다해야 했던 필자가 맨 처음 놀란 것은,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훨씬 더 많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대학의 경우에는, 학생·직원·교수들은 너나없이 거의 모두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자동차를 끌고 나가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체력 쇠약 등의 이유로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 대중교통을 사용한다. 자동차에 대한 이러한 혐오증은 무엇과 관련이 있을까. 일차적으로 매연으로 인한 환경오염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보편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과시적 소비는 완전히 무의미
자전거로 가기 어려운 장거리면, 오슬로 시민들은 보통 지하철, 버스, 전차 등의 매우 다양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다. 이 대중교통에 대해서 필자가 가장 놀랐던 것은, 검표제도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지하철역에서는 검표기계가 아예 설치되어 있지도 않다. 매표 여부를 검사하는 매표소 직원들도 전혀 안 보인다. 자동 매표 기기에서 표를 사서 스스로 이를 한번 찍어 바로 승차하면 된다. 차 안에서 검표하는 보안요원들이 드물게 나타나지만, 노르웨이에서 5개월 이상 살았던 필자도 그들을 딱 한번 만났다. 무임승차를 계속해도 벌금이 물릴 위험성이 없는 이 상황에서도,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무임승차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차를 놓치면서까지 자동 매표 기기에서 꼭 자신의 표를 꼼꼼히 찍는 ‘작은 의인’들을, 필자가 몇 차례에 걸쳐서 목격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에서 “남의 것을 훔치면 천벌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대다수 노르웨이인들의 종교 심성도 엿보이지만, 그것보다도 “공익에 해를 끼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회민주주의의 윤리가 읽힌다. 국가가 시민들의 의식의 성숙성을 믿어 매표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르웨이사회 내에 국가와 시민 사이의 ‘상호 신뢰도’가 어느 정도 높은가를 잘 보여준다.
버스기사 월급이 교수와 비슷
그러나 노르웨이에서 버스를 몇번 타보니 그 생각이 굉장한 단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 운전기사들은 운전도 부드럽고 여유로운 자세로 할 뿐만 아니라 승객들에게 길을 매우 자세히 가르쳐주고 외국인이면 노르웨이 이야기도 유창한 영어로 해줄 만큼 직업과 고객에 충실하다. 한국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여기에서 모르는 장소를 찾아갈 때, 가장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기사들의 설명과 충고들이다. 이러한 차이가 왜 생겼을까? 민족윤리나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에서 주객 의례가 유럽보다 훨씬 더 발전되었다는 사실까지 상기한다면, 더욱 신기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점에서 바로 ‘자본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와 ‘노동·소비자 중심’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차이를 잘 느낄 수 있다. 돈도 없고, 돈으로 사는 교육도 잘 받지 못한 운전노동자가 천시를 받고 살아야만 하는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의 정글’과 달리, 노르웨이에서 운전기사의 노동은 사회적으로 매우 귀중하게 여겨진다. 기사 자신들도 승객의 생명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기사에게는 잔업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고 기사의 월급은 대학교수나 정부 공무원과 대충 비슷하거나 약간 높다. 그 어렵고 위험한 노동의 가치를 사회가 그만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이러한 인정에 대해 기사는 예절과 직업에의 충실로 보답한다. 만약에 한국 기사들에게 노르웨이 동료들이 받고 있는 사회적 존경과 보수가 주어졌다면- 아니, 기사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라도 조금 바뀌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이 버스 안에서 신경질적인 반말소리가 들리겠는가? ‘노동 중심’의 사회가 의식상으로라도 되지 않고서는, 노동자에게 자존심과 타인에 대한 예절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노르웨이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거장 근처에서는, 보통 신문, 잡지 등과 간단한 음식을 파는 작은 상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문이 놓여 있는 곳을 볼 때마다, 필자는 초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규모가 작고 시내와 아주 먼 상점이라 해도 보통 소수만 보는 공산당 신문이나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의 다양한 신문들이 꼭 나열되어 있었다. 인접 스칸디나비아 국가인 스웨덴, 덴마크의 신문들이 보이지 않은 데는 아예 없었다. 보통 원어민 수준으로 잘하는 영어 이외에도 또 하나의 유럽 언어(독어, 불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일반 노르웨이 사람들이, 지리적·문화적·이념적으로 아주 다양한 자료로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노르웨이에서도 몇종의 상업적인 보수 일간지가 열독률이 가장 높지만, 다양성이 보장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보수 언론들이 왜곡된 보도로 노골적인 혹세무민을 할 가능성은 없다. 이념적으로 이질적인 신문이나 외국 신문을 일반인들이 평소에 읽는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한국에서 국제 정보 고립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원죄만으로…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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