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네트워크] 말리는 자가 더 미운 이유그동안 외면하며 탈리반의 불상파괴를 조장한 서방이 이제야 호들갑 떨다니…
“임금에서부터 관리들과 백성 모두가 헌신적으로 삼보(三寶)를 받들어 모시고….”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 먼 길을 떠났던 혜초. 727년 눈덮인 힌두쿠시의 깊은 계곡 바미안에 우연히 닿은 이 순례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석불 앞에 엎드려 감동적인 불심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발길이 스쳐간 몇년 뒤, 바미안의 왕자가 회교로 개종하면서 3∼4세기에 건설했던 불국토의 꿈은 수난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었다. 먼 훗날 고대 바미안 연구의 빛나는 자료가 될 혜초의 기록들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정당성 얻은 미국
그로부터 1300년 동안 갖은 박해와 눈보라를 견뎌왔던 바미안의 불심은 이제 그 최후의 시간을 맞고 있다. 광신적인 종교, 야비한 국제정치, 대개 이런 것들이 공모한 결과다. “우상을 인정할 수 없다. 회교법에 따라 불상을 모조리 박살내라.” 지난 2월26일 아프가니스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탈리반의 최고지도자 물라 모하마드 오말의 교령이 전해지자, 즉각 ‘문화적’인 국제사회는 ‘발광’하기 시작했다. “이 놀라움, 이 무기력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유네스코 사무총장 마쓰우라 코이치로를 선두로 각국 정부와 단체들은 다투어 성명을 발표했다. “인류의 문화재산을 파괴하지 말라”, “인류와 역사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라크를 초토화시킨 걸프전 때를 연상시킬 만큼 국제적으로 ‘입맞춘’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하라”,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주도했던 걸프전과 비교하자면,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비교적 조용하게 사태를 ‘즐기는’ 인상이 차이라면 차이이다. 걸프전의 경험으로 그만큼 더 교활해진 셈인가? 스리랑카, 타이, 인도, 네팔 같은 불심국가가 반탈리반전선의 선봉에 선데다 “문화유적 파괴는 회교의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회교국가들마저 소리질러 주는 마당에 굳이 나서서 국제사회를 ‘줄세울’ 필요가 없다는 입장인 듯하다. 어쨌든 이제 미국은 ‘눈엣가시’였던 탈리반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는 지구적 규모의 정당성을 얻었다. 1998년 케냐 주재 미국대사관 폭파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을 탈리반이 숨겨준 데 앙심을 품고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사회를 향해 명중률마저 의심스러운 가공할 수백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던 전력을 지닌 미국이 올 들어 유엔을 통해 대아프가니스탄 봉쇄를 결정하고 딱 한달 만에 가히 ‘바미안의 선물’로 부를 만한 일이 발생한 셈이다. 국내외 언론들도 예외없이 반탈리반전선에 동참했다. “문화유적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탈리반”을 머릿기사로 매일 온 세상 지면을 뒤덮고 있다. ‘인류’, ‘문화’, ‘역사’, 이런 단어들이 세계적 규모로 한꺼번에 지면을 뒤덮는 매우 특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는 탈리반의 파괴적인 ‘도박’만 있을 뿐 국제정치판의 공격적인 ‘맞장’으로 비롯된 현 사태의 본질은 없다. 한길로만 가는 통일된 세계언론, 이건 불길했던 걸프전의 예감을 되살려놓는다. ‘인권’, ‘평화’, ‘자유’, 이 단어들로 지면을 메웠던 국내외 언론들은 결국 자신들의 나팔소리가 대량학살의 전주곡이 되었다는 사실을 지금도 감추고 있지 않은가. 한술 더 떠 영국의 대영박물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며칠 뒤에는 대만의 고궁박물관까지 나서서 “유물을 부수느니 차라리 팔아라”고 선전고를 울려댔다. 이 희한한 발상들에 각국 정부도 가세하고 있다. “석불들이 회교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장벽을 설치해주겠다.” 마치 문화올림픽이라도 하듯 앞다투어 ‘문화적’인 아이디어들을 쏟아내고 있다.
탈리반, ‘어머니’의 뺨을 치다
그동안 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해온 기자의 눈에는 부수고자 하는 이들이나 말리고자 하는 이들이나 모두 광신적 또는 가식적인 문화박약자로 보일 뿐이다. 인류가 이다지도 문화적이었던 때가 역사적으로 또 있었던가? 23년 전쟁, 그 속에서 100만명 넘는 사람들이 죽어왔는데 문화적인 국제사회는 무엇을 했던가? 500만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쏟아져나와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는데 문화적인 세계정부는 또 무엇을 했던가? 정직하게 말해, 2주 전부터 바미안이 입에 오르내리는 동안 기자는 이 못난 인류 또는 국제사회에 절망해버렸다. 얼굴없는 부처가 느닷없이 중요하게 느껴진 국제사회나 정신없는 부처를 우상파괴의 재물로 삼은 탈리반이나 모두 야비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탓이다. 굳이 광신주의 탈리반이 파괴선언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바미안의 문화유적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다. 몇해 전 바미안전선을 따라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입은 유적들을 확인했다. 몽골의 칭기즈칸이 쳐들어와 나무로 붙여 만든 대석불의 안면과 팔을 불태워버린 뒤, 다시 무갈제국의 아우랑제브는 다리부분을 깨트려 놓았고, 지진과 누수 같은 자연현상들도 취약한 사암불상들을 손상시키는 데 한몫해왔다. 현대 들어서는 부서지기 쉬운 사암의 성질도 정확히 규명하지 않은 채 시멘트로 달려들었던 1940년대 프랑스와 60년대 인도유적보수단의 날림공사도 파괴를 부추겼고, 79년 러시아 침공으로부터 시작된 지난한 전쟁은 천연요새인 바미안 석굴유적지를 온통 전쟁물자창고로 만들며 파괴를 촉진했다. 국제사회가 이걸 진정 모르고 있었겠는가? 결과적으로 탈리반이라는 교·정일치의 전근대적인 정치집단은 ‘적’을 필요로 하는 미국 주도형 국제질서 속에서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는 말인데,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국제적 규모로 집단광분하는 것이 문화유산을 앞세운 새로운 형태의 세계화전략에 말려든 인상을 풍긴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이 극단적인 종교주의 탈리반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식을 패는 어머니를 연상해 보면 어떨까? 이 유적파괴의 원흉 탈리반은 미국의 배꼽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의 남하를 봉쇄하고 가스와 원유를 비롯한 자원의 이동로를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대중앙아시아전략의 일원으로 설계된 탈리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뒷돈을 받아가며 파키스탄을 전쟁물자 보급기지로 삼아 성장해왔다. 이번에는 어머니를 내팽개친 자식을 연상해 보면 될까? 1997년 카불을 장악한 뒤 승승장구, 전 아프가니스탄의 95%를 점령한 탈리반이 극단적인 회교원리주의를 실행에 옮기자 결국 반미를 위해 기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양쪽 모두 뒤늦게 깨닫는 꼴이 되고 말았다. 탈리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이 낙인찍은 이른바 국제테러리스터들의 군사훈련장 노릇을 해온데다, 특히 탈리반이 1998년 케냐 주재 미국대사관 폭파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서부터 결정적으로 관계가 틀어져 버렸다.
불상파괴는 오래 전부터 존재
이런 과정에서 탈리반의 우상숭배 파괴, 이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1996년 카불을 점령한 탈리반이 내린 첫 번째 교령이 바로 우상숭배의 기능을 지녔다고 본 모든 영상물과 사진에 대한 소각과 금지였다. 그리고 1998년 바미안을 점령한 탈리반은 불교유적지에 대한 파괴를 이미 수도 없이 선언해왔다. 실제로 바미안 점령 첫날부터 탈리반 병사들은 소석불을 로켓포로 쏘아 깊은 손상을 입히며 전면적인 파괴의 가능성을 예고했다. 이때부터 탈리반은 바미안을 ‘흥정거리’로 삼아왔다. 탈리반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바미안유적을 거론하며 관심을 유도했으나 국제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탈리반은 실질적인 아프가니스탄의 합법정부로 인정받고자 무진 애를 써왔으나 국제사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유엔의 아프가니스탄 의석에는 속된 말로 ‘조랑말밖에 없는’ 랍바니 전 대통령 정부 대표가 앉아 있을 정도로 탈리반은 철저히 외면당해왔다. 이런 가운데 탈리반은 바미안의 불교유적 파괴라는 거의 자폭에 가까운 도박을 벌였고, 유적을 보호하자니 탈리반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유엔과 국제사회는 뒤늦게 대표단을 파견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다. 바미안의 불교유적 보호, 그러나 이미 때를 놓쳤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지난 3년간 시간과 기회가 있었는데도 국제사회는 철저하게 무시해왔다. 탈리반이 불교유적들을 파괴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3년 전부터 국제사회는 예상하고 있었던 일임에도 말이다. 전문가들이 그동안 바미안유적을 살릴 수 있었다고 본 까닭은 탈리반의 파괴선언이 종교적 동기보다 정치적 배경을 강하게 깔고 있었다고 믿은 탓이다. 결국 바미안의 최후로 예상되는 이번 사태도 유엔이 대아프가니스탄 봉쇄결정을 내린 지 한달 만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어쨌든 3월10일 현재, 바미안의 유적들 가운데 표적이 된 대석불(53m)과 소석불(38m)의 운명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태다. 탈리반 당국이 바미안 현장에 대한 취재를 허락하지 않는데다 당국자들의 말도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얼굴과 다리부분은 벌써 파괴했다.” 3월10일 새벽 2시(한국시각) 기자가 통화한 탈리반 외무부 당국자의 말과, 비슷한 시간 아프간 <이슬라믹프레스>(AIP)가 입수한 “대형폭발이 있었다. 대석불은 이미 가루로 변했다”는 정보가 다르고, “3월2일 이미 파괴하기 시작했다. 우리 병사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박살내고 있다”는 탈리반 공보장관 쿠아드라툴라 자말의 말이 또 다르기 때문이다.
인류 모두가 범죄자로 기록될 것
지난주까지만 해도 석불의 생존에 대한 기대섞인 관측들이 많았으나, 이번주 목요일 회교 성일이 끝난 8일부터는 절망적인 보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바미안의 유적들이 이미 운명을 다했거나 적어도 머지않아 절멸하게 될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으로 유네스코 대표단을 맞이했던 파키스탄 주재 탈리반 대사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건 최고성직자의 교령이고, 교령이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정부가 이행을 중단할 수는 없다.” 지구상에서 가장 순결한 회교국가건설을 최후, 최고의 단계로 설정한 탈리반의 정체가 집약되어 있는 그의 말마따나 최고지도자 물라 오마르의 말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번복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3년 동안 바미안유적파괴설이 끊임없이 나돌았지만 이번처럼 물라 오마르의 공식적인 교령은 없었다. 사라져가는 혹은 사라져버린 바미안의 문화유적, 이 불손한 행위를 막지 못한 2001년의 인류 모두를 훗날 역사는 파렴치한 범죄자들로 기록하게 될 것이다. “탈리반의 광신이 있었다면 당시 국제사회는 미국이 주도하는 야비한 정치에 휘둘려 문화유산파괴를 저지하지 못했고, 사실은 관심도 없었고….”
정문태/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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