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 2000년12월12일 제338호 

[정치] 권력의 입맛에 맞춘 ‘개헌사’

우리 헌정사에서 개헌은 집권세력의 권력 연장책과 거의 동일하게 인식돼왔다. 1948년 7월17일 헌법이 제정공포된 뒤 지난 53년간 9차례나 개헌을 했지만, 1960년 4·19 직후 의원내각제 개헌(3차)과 87년 민주화투쟁을 통해 쟁취한 직선제 개헌(9차)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권자의 입맛에 맞춰 추진됐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개헌론의 핵심에는 국민의 기본권 향상이나 경제개혁 촉진, 반통일적 요소의 삭제 등 생산적 논쟁보다 누가 어떻게 권력을 잡고 유지하느냐라는 권력구조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집권자의 입맛따라 움직인 개헌의 첫 싹은 헌법의 첫 단추를 꿰는 순간부터 움텄다. 남쪽만의 단독총선거에 반대해 중도파 인사들 대부분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1948년 5·10 총선에서 한민당 계열 인물 30명이 헌법기초위원으로 당선됐고, 이들은 논의를 거쳐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기초로 한 권력구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승만 당시 제헌의회 의장은 “내각제 아래서는 어떤 지위도 맡지 않겠다”고 버텼고 결국 ‘단원제와 국회의 간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제’를 골격으로 한 최초 헌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는 개헌논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발생한 거창양민학살사건(51년 2월), 국민방위군사건(51년 3월) 등 거듭된 실정과 경제난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렸고 기존의 국회의 간선제로는 대통령에 재선될 수 없다고 판단하자, 51년 11월30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그러나 국회가 이 개헌안을 부결시키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의원을 헌병대로 연행한 뒤 52년 7월4월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을 골자로 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처리한다. 이 대통령은 이어 54년 11월29일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 철폐’를 내용으로 한 사사오입개헌안(3차)을 강행처리하면서 4·19 민중혁명으로 권좌에서 축출될 때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거머쥔 박정희 소장도 4·19로 실시된 내각제헌법을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62년 12월26일)로 바꾼다. 그리로 2차례 대통령직을 수행해 더이상 대통령이 될 수 없게 된 1969년 9월14일 국민과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 제3별관에서 집권공화당 의원들만으로 3선 개헌안을 가결시키는 등 제멋대로 헌법에 손을 댔다. 특히 1972년 12월27일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가운데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으로 대통령을 뽑는 유신헌법 선포는 그 결정판이었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뒤 80년 8월27일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씨는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 해소를 명분으로 그해 10월27일 7년 단임제를 핵심으로 한 개헌안을 처리한다. 이른바 5공화국 헌법이다. 그러나 이 역시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 방식어어서 야권과 민주화 세력이 제기한 직선제개헌론의 불씨가 됐으며, 결국 87년 6·10항쟁을 통해 현행 5년 단임의 직전제로 대체됐다. 그러나 항쟁의 성과물로 쟁취된 현행 헌법 또한 집권 민정당의 6년 단임안과 야권 후보의 단일화를 염두에 둔 통일민주당의 4년 중임제 방안이 맞선 데 따른 정치적 절충 성격이 강하다. 특히 당시 집권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와 YS, DJ, JP 등 3김씨가 모두 집권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낙선할 경우 재도전이 수월하도록 만든 흥정물이란 혹평을 받기도 했다. 실제 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에게 정권을 내준 YS와 DJ는 이후 번갈아가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이후에서도 이른바 ‘3당 합당’에 따른 내각제 각서파문과 97년 DJP연합 때 내각제 개헌 약속 등 권력구조를 둘러싼 개헌의 불씨는 계속 이어졌다. 다만 배신과 현실 정치의 역관계가 맞물리면서 모두 백일몽으로 끝났다는 게 좀 색다르다. 그리고 최근 2002년 대선을 염두에 둔 대권주자들을 중심으로 4년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를 도입하자는 개헌론이 다시 타오르고 있다.

신승근 기자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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