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의 동서횡단] 이름 붙이며 신을 닮는다?언어란 우주를 파악하기엔 무딘 도구… “길은 이름 없음 뒤에 숨어 있다”
“길을 길이라 말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1장) <노자> 첫머리의 이 발언은 아마도 인류가 철학을 포기하지 않는 한 숱한 사색가들이 끊임없이 문제로 삼을 발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름을 바로잡는” 일이 사상투쟁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춘추 말기, 노자는 쟁론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갑론을박하는 대신, 인간이 세계(우주)에 대해 이름 붙이는 행위 자체에 대해 반성한다. 그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름(언어)이란 세계(우주)를 그려내는 데는 지극히 무디고 역부족인 도구임을 자각한 철학자였다. 그가 말하는 ‘길’이란 자연의 길이다. 그것은 조물주가 만든 게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게 있는 길이다. 노자는 길이 도대체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며, “상제보다도 앞선 듯하다”(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4장)고 말한다. 완곡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길이 “상제보다도 앞선 듯하다”는 그의 발언은 시대의 획을 긋는 인식의 혁명을 담고 있는 말이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상제(上帝)란 유대교의 최고신 야웨와도 같은 존재였다. 상(商)나라 사람들은 상제에게 전쟁과 제사 등 국가의 대소사를 일일이 점쳐 물었다. 그런데 노자는 우주와 인간사를 주재하는 절대자인 상제보다 ‘길’이 더 앞선 듯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발언의 심각성은, 가령 고대 유대교사회에서 어떤 철학자가 나타나 “야웨보다 앞선 어떤 것이 있는 듯하다”고 발언했다고 상상해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길: 상제보다도 앞선 것
노자는 다시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름이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이다. 인간은 세계를 쪼개어 각 부분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을 인식 가능한 개체로서 파악한다. 만약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사태나 사물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 바깥으로 밀려날 것이다. 세계의 어떤 사태나 사물도 생성(becoming) 가운데 있지 아니한 것이 없다. 오늘의 강물은 어제 발을 담그던 그 강물이 아니다. 노자가 본 우주란 끊임없는 생성 과정에 놓여 있는 우주다. 인간의 무딘 인식도구로는 상대적으로 정지된 듯이 보일지 몰라도, 우주의 운동은 조금도 쉼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세계를 노자는 ‘길’이라고 불렀다. 지금 중원의 철인들이 모두 나서서 “바로잡겠다”는 ‘이름’이란, 바로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과정에 놓인 세계를 붙잡으려는 인간의 미망이 기대고 있는 매우 섬세하지 못한 수단이다. 노자는 근본적으로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가소로운 발상인지를 관조하고 있다. 그래서 노자는 “길은 늘 이름이 없다”(道常無名. 32장)거나, “길은 이름 없음 뒤에 숨어 있다”(道隱無名. 41장)고 말한다. 길이란 인간의 이름 붙이는 행위 너머에 놓여 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해 자의적으로 이름 붙이고 이를 인간의 시각으로 파악하는 인간중심주의에 너무도 익숙하다. 노자는 이런 인간중심주의의 끝간데를 보고 있다. 인간이 세계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의 기원에 대한 설명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유대 겨레의 역사·설화집인 ‘모세오경’ <창세기>에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세기> 2:19∼20 전반부) 이건 설화이므로 우리는 아담이 동식물 분류학이나 백과전서파의 태두라거나, 알파벳 순서도 없는 상태에서 수만여종의 즘생 이름을 짓느라 머리가 다 세었을 것이라는 따위의 상상을 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설화가, 인간이 세계에 이름 붙이는 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한 가장 오래된 인간중심주의적 설명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창세기>의 인간중심적 설명
<창세기>에는 언어 문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 몇곳 더 있다. 그중 하나는 야웨(또는 엘로힘)의 천지창조 과정에 등장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세기> 1:3) 유대교의 최고신 엘로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일은 매우 유명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으면 몇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엘로힘은 이때 어떤 언어를 썼을까?(아마도 유대교에서는 히브리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태초에 히브리어로 야웨와 대화를 했다고 한다. 유대교 정통파들은 히브리어가 성스러운 언어이므로 오직 성서를 읽는 데에만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다른 의문: 엘로힘은 왜 꼭 ‘말씀’을 하셔야 했을까? 그것은 대상이 없는 독백이었을까? 아니면 명령을 수행할 대상이 있었을까? ‘빛’이라는 존재를 대상으로 “너 이제부터 존재하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면, 빛은 엘로힘이 명령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얘기가 되므로 모순에 빠진다. ‘빛’이라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던 다른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이제부터 빛으로 변하라”는 명령이었다면 <창세기>는 이미 태초의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변한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야웨의 천지창조 당시 적어도 땅, 물, 어둠은 이미 야웨와 함께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어떤 대상이 빛으로 변한 걸까? 또다른 의문: 그때 창조된 것은 오로지 순수한 빛만이었을까? 아니면 빛을 내는 광원, 다시 말해 태양 따위의 가스 덩어리를 창조하신 걸까? 인간의 이해 범위 안에서는, 어떤 매개체가 없이 존재하는 빛이란 없다. 가령 태양빛은 태양이라는 별에 모인 수소와 헬륨 가스의 연소에 의해 빛을 낸다. 우주의 다른 별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창세기>에 따르면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태양)과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달)과 별들은 넷째 날에 창조된다. 그러므로 창조의 첫날 “빛이 있으라”는 말로 만들어낸 빛은 태양이나 별이 아니다. 결국 “빛이 있으라”는 말은 듣는 이가 없는 말이며, 누구와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없음에서 있음을 창조해내는(ex nihilo) 무성생식과도 같은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진 빛 또한 어떤 매질을 지니지 않은, 울대없이 존재하는 소리와도 같다. 18세기의 성서학자 비터와 아스트룩의 연구 이후 모세오경에 서로 다른 문체를 지닌 몇 가지 문서가 섞여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하나는 유대교의 절대자를 ‘엘로힘’이라 부르면서 그를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는 초월적 존재로 묘사하는 문서로서, 이를 E문서(‘Elohim’의 ‘E’를 딴 것)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을 ‘야웨’라 부르며 그를 인간사에 깊숙이 개입해 들어와 분노하기도 하고 징벌을 내리기도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의 절대자로 묘사하는 문서로서, 이를 J문서(‘Jehovah’의 ‘J’를 딴 것)라고 부른다. E문서(<창세기> 1장∼2:3)는 엘로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는 방식으로 천지를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고, J문서(<창세기> 2:4∼2:25)는 엿새 만의 천지창조에 대한 언급없이 야웨가 진흙을 빚은 뒤 코에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든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E문서는 엄격한 사제가 서술한 듯 규범적이지만, J문서는 풍부한 설화 자료를 수집한 역사가가 정리한 듯 문체가 빼어나고 이야기가 풍부하다. 성서 고고학자들은 E문서와 J문서가 대체로 서기 전 7세기경에 다른 편집자에 의해 종합되어 JE문서로 정착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름이 없던 시절의 우주에 대한 상상
절대자의 ‘말씀’에 의해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절대자의 이름 붙임에 의해 어떤 존재가 생성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창조된 만물의 숲에 들어가 낱낱의 이름을 다시 지은 것은 사람의 일이다. J문서의 기자가 참조했을 것으로 보이는, 서기 전 17세기 경에 점토판에 기록된 바빌로니아의 창조서사시 ‘에누마 엘리쉬’는 좀더 분명한 말투로 이렇게 말한다. “그때 위로 하늘이 이름지어지지 않았고, 아래로 마른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 그때는 어떤 신들도 나타나지 않았고, 이름으로 불려지지 않았고, 운명도 정해지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노자> 또한 우주의 거대한 역사 가운데서 인간의 이름 붙임을 획시대의 요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말한다.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시작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1장) 개나 늑대나 사자 따위가 자기 먹이에 대해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 우리는 아는 바가 없으려니와, 적어도 인류의 역사에서 사유의 시작은 노자의 말처럼 온갖 것에 대해 ‘이름 붙이는 행위’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같은 사태를 두고 <창세기>는 이를 신화적으로 정당화하고 있고, <노자>는 이를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눈으로 반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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