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여자박사, 그 처절한 수난

배움이 많아 서글픈 고학력 여성 실업자들… 강사 자리도 남성들의 독무대 양상

“여자가 무슨 공부를! 시집이나 잘 가면 되지.” 이런 시절이 있었다. 이같은 편견은 우리네 숱한 누이들로 하여금 공부의 꿈을 접도록 했다. 공부를 좀 못해도 아들은 어떻게든 대학을 보내려 했지만 전교 1∼2등 하더라도 딸은 그저 조신하게 있다 시집 잘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달라졌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딸들을 다 대학에 보내려 한다. 되레 못 보내서 난리다. 교육부에 따르면 전국 대학 재학생 중 여학생 비율은 2000년 기준으로 38%. 국립대 재학생 중 여학생 비율은 좀더 높아 44%에 육박한다.

고학력 사회의 재앙, 여성만의 몫인가

최고학력인 박사학위마저도 더이상 여자들에게 드높은 장벽이 아니다. 경제적인 형편만 되면 물건너 유학까지 간다. 실제 1980년 여자의 국내·외 박사학위자는 50명도 채 안 됐지만 2000년에는 무려 1500여명에 이른다. 이는 80년 이래 연평균 22% 증가한 비율로 남자박사의 연평균 11% 증가에 비해 2배나 되는 수치이다. 한국사회에서 고학력화가 급속히 이뤄지는 가운데 여자들의 고학력화는 더욱 빠르게 진전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학위를 거머쥔들, 그 어떤 이유로 그들에게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거나 기회가 적다면, 또 고학력이란 게 그들의 진로에 되레 큰 짐이 된다면, 이 또한 한번쯤 단단히 짚어봐야 할 사회적인 문제임에는 분명하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직업진로정보센터 소장 진미석(43)씨. 그는 83년 서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88년에 명문 하버드대학에서 박사(교육학)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도 오늘의 자리를 얻기까지는 무려 9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88년 당시 직장을 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까 싶었다. 그러나 그건 순진한 그의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서울지역 대학에 수차례 응시했지만 번번이 쓴잔을 들이켜야만 했다. 아무래도 수도권은 좀 무리다 싶어 나중에는 지방도 마다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국책 연구원 등 갈 만한 다른 직장도 마침 불어닥친 경제위기 상황으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런 현실이 모든 박사들의 공통된 수난이니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남자 선후배 동료들은- 역시 쉽진 않았지만- 어쨌든 몇년 고생하다가도 나중에는 연구소나 대학 등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들과 그는 처지가 달랐던 것이다. 진 박사는 그제야 숱한 면접과 응시의 나날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큰 장벽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을 절실하게 느껴야만 했다.

그나마 진 박사는 스스로 자신이 다행인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96년 말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진로지도를 새롭게 공부하던 중 이듬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족하면서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박사학위를 갖고도 여전히 거리를 떠돌고 있는 여자박사들은 여전히 부지기수다. “기약없는 일용잡급직 보따리 지식장수”라고 자조하며 대학강사 생활을 수년째 계속하며 외줄타기 곡예를 벌이고 있는 군상, 학문적 성취를 썩혀가면서 삶을 기껏 자조할 수밖에 없는 고등실업자들…. 여자박사들 상당수가 결국 이같은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최근 진 박사는 이런 여자박사의 현실을 탐색해 한권의 책으로 펴냈다. <여성 고급인적자원의 활용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란 책자가 그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해방 이후 2000년까지 우리 사회는 대략 1만2500여명의 여자박사를 배출했다. 교육부의 협조를 통해 진 박사가 집계한 수치에 따르면 이 가운데 현재 대학에서 취업하고 있는 여자박사는 5300여명이다. 여자박사 중 42.5%가 대학에서 교수 등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 국·공립연구소 연구원 300여명, 기업체나 기업부설연구소 130여명, 의사 등 자영인이 1200여명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들이 그대로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최대 5500여명의 박사학위 소지자가 대학이나 연구소 등지에서 정규직으로 취업하지 못하고 임시직 등으로 있거나 집에서 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중 상당수가 대학강사직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전국강사노동조합은 이들을 5천여명으로 추산한다.

여자박사의 66%가 정당한 대우 못 받아

지난해의 여자박사 실업률은 남자박사의 두배격인 66%였다. 평균 학위취득 소요시간 65.7개월, 등록금 등 직접경비 2422만원에 생활비 등 기회비용 1억4천만원. 이런 그들 중 상당수는 지금 연평균 866만원의 보따리 장수에 만족하거나 그나마도 구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대학강사 김아무개(39)씨도 그중 하나다. 그는 92년부터 거의 10년 동안 강사생활을 해오고 있다. 박사학위(중국여성철학)를 97년에 성균관대에서 받아 박사강사로서는 4년째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수차례 연구소와 연구원 등의 취업공고에 응시했다.

“이제는 포기했어요. 사실 여자들에게 전임강사를 주는 대학 거의 못 봤거든요. 심지어 이 강사자리마저 남자 다음에 여자이니까요.”

이런 취업난은 분야별로 특히 심각한 편차를 보이는데, 인문학 분야의 경우에는 더 심각하다. 1999년 인문학 전공 여자박사의 신규입직자(취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취업률은 평균 5.6%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남자박사는 24.3%이다. 이 가운데 철학이나 역사학을 전공한 이들은 아무도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에 비해 남자는 철학 18.5%, 역사학 32.6%로 나은 편이다. 이런 수치는 우리 사회에 엄존하고 있는 남녀차별이 여자박사들의 취업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보따리장수 강사생활을 하면서 대학에만 13번이나 응시를 했습니다만 모두 떨어졌습니다. 왜? 제가 못나서요?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건 제가 남자였다면 아마 벌써 직장을 얻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진 박사의 말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지 3년 만에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원이 된 박성정씨는 “공식적으로 채용공고에서 남녀차별은 없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남녀성별이 큰 기준 중 하나란 것을 늘 체험했다”고 말했다. “남자에 비해 학문적 능력이 떨어진다, 여자는 가사노동을 부담하니 직장에 충실하지 못하다, 위계구조가 필요한 연구소에서 여자는 남편이 생계를 책임지니 상사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등등. 이런저런 말로 표현된 차별적 악태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제 대학에서 여자교수의 비율은 2000년 기준 15.6%에 불과하다. 국립대는 9% 수준이다. 물론 여자박사들의 취업을 방해하는 요소가 이것만은 전부가 아니다. 남승희 교육인적자원부 여성교육정책담당관에 따르면 여성들의 비현실적인 진로의식도 이에 한몫한다. 취업이 어려운 인문, 이학계열 등 기초학문 분야에 집중돼 있는데다 남자에 비해 진로설정이 구체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취업이 유망한 정보통신 컴퓨터분야나 그렇지 못한 인문학 분야나 모두 여자박사의 취업률이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에서 여자박사의 취업난은 많은 여자박사들의 주장처럼 우리 사회의 여성차별적 관행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변하지 않는 차별적 악태와 관행들

학문적 성취에서 남자와 여자의 능력차이가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 아니다. 아니, 감성과 상상력 등이 요구되는 21세기에는 되레 여성성이 개인은 물론 국가의 경쟁력을 크게 좌우하는 요소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교육부나 여성부 그 어디에도 여자박사의 실업난에 대한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간혹 여자박사는 그나마 있는 집 딸들이지 않느냐는 말을 하는데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회에서 여자박사도 직장 구하기가 이렇게 힘드는데, 다른 여성들은 얼마나 힘들겠냐구요?” 박성정씨의 말이다.


이창곤 기자 g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