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식민지 여성은 동굴 속에서 울었네조선인위안부가 끌려갔던 오키나와 현장… 우리의 손으로 위령비 세울 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와 군대가 식민지의 여성을 끌고 가 군인들의 성노예로 이용한 세계사에 유례없던 인권침해 사건이다. 그동안 역사의 미로 속에 감춰져 있다 90년대 들어서야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과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점차 그 실체가 드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배상문제·사건발굴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너무나 많다.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끈질기게 조사·연구해온 한국정신대문제연구소의 강정숙 연구원이 최근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군위안부의 역사적 현장을 열흘 동안 직접 찾아본 뒤 탐방기를 보내왔다.편집자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일본군이 군 위안소를 건축하고, 관리 통제한 모습이 문서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이다. 위안소 흔적도 아직 여러 군데 남아 있다. 공항에 내려 처음 찾은 곳은 오키나와 본섬 중심지인 나하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간 기노완시였다. 기노완시 가가스 고지는 1945년 4월 미군과 일본군의 공방이 치열했던 격전지. 50년이 지났지만 곳곳에 토치카, 포대 등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조선인 군속 386명, 위안부 30인을 기린다는 ‘청구(靑丘)의 탑’을 위시해 각 현별로 비석들이 서 있기도 하다. 1944∼45년에 걸쳐 전개된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때 희생당한 한국인에 대한 위령탑은 이것만이 아니라 평화기념공원이 있는 마부니의 한국인위령탑, 도카시키섬의 ‘백옥(白玉)의 탑’도 있다. 청구의 탑을 세운 이는 일본 우익이다. 일본 우익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에 희생당한 조선인 군인 군속과 군위안부에 대해 조의를 표하는 이유는 오직 일본의 전쟁에 희생해 주어서 불쌍하고 고맙다는 생각 때문이다. 청구의 탑을 세운 것도 강제연행당한 조선인들에 사죄의 감정으로 세운 것은 아닐 것임을 생각하니 씁씁하다. 잃어버린 나라의 민족으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간 이들을 위해 이곳에도 우리의 손으로 위령비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오키나와, 밝혀진 위안소만 130개 이상
바다에서 밀려드는 미군과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기노완시에는 제62사단 이시 병단 부대가 주둔했는데 5개나 되는 위안소가 있었다. 제62사단은 군위안부를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폭격으로 피난온 위안부라 하더라도 다른 부대 소속일 경우 그 내용을 밝히고 다시 이시군과 직접 계약하는 형식을 취했다. 일단 군위안부가 되면 위안부들의 생활은 전적으로 군대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식량은 물론 담배까지 군이 간여하여 처리했다. 특기할 것은 이시 병단은 군인들이 위안소를 이용할 때 그 값을 정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취소되긴 했지만 이 이용료에 12할의 세까지 포함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폭격과 개발로 군위안부 여성들이 기거했던 위안소가 그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은 없다. 1992년 오키나와에는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위안소만 해도 130개 이상인데 그 중 본섬에서만도 90여개가 있었다. 그 한곳 한곳이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참으로 조선인위안부의 처절한 현장을 보여주는 곳은 이토가즈 동굴 위안소이다. 이 동굴은 높이 10m를 넘고 길이는 약 270m에 달하는 종유석 자연동굴이다. 지금도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밖의 뙤약볕과는 달리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아 축축하고 캄캄한 동굴이다. 이곳은 1945년 2월 이후 독립혼성 제44여단 소속 공병대 주둔지로, 하에바루 육군병원의 분실로, 주민의 피난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2천여명이 넘는 이들이 이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숙식하며 생과 사를 오갔다. 비명을 지르는 부상병, 사망자의 시체들, 미군 폭격에 몰려들어온 주민들, 미군 상륙 뒤에는 동굴에서 나오라는 미군의 호소에 따라 나가다가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현장 바로 여기에 조선인 군위안부가 있었다. 군위안소는 1945년 2월에서 6월 초까지 있었는데 조선인 여성 6∼7명이 있었다. 처음에는 동굴입구에서 얼마 안 되는 곳에 위안소가 있었으나, 병원이 동굴로 들어오고 여학생들이 부상병을 간호하는 시점에는 안쪽으로 이동하였다. 6월 이후에 조선인위안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엄청난 피해를 받으며 패퇴하고 있던 일본군들이 얼마나 끝까지 군위안부를 끌고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공습하에서도 살아남고 혹 부대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라 하더라도 오키나와인들도 살기 힘든 그때 군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살아갔던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이외에도 다마구스쿠에는 위안소가 다마구스쿠 초등학교분교 등 3군데가 더 있다. 그리고 이번 조사에서 해방 이후 다마구스쿠 촌민의 집에 수용한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증언도 들었다. 오키나와 본섬에서 기노완시, 다마쿠스크손, 하에바루초 등 몇곳의 위안소 흔적을 찾은 뒤, 우리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리오모테섬을 향했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인 군위안부만 아니라 광부, 군부, 선원들이 있었다. 이리오모테섬은 나하공항에서 비행기로 50분 걸리는 이시가키지마에서 다시 배를 타고 40분 정도를 가는 곳이다. 일본 본토는 물론 오키나와 본섬보다 대만과 가깝다. 일본영해의 1/4을 오키나와현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멀리 떨어진 섬이다. 전쟁이 끝난 뒤 인구 수가 줄어들어 오키나와현에서 오키나와 본섬 다음으로 큰 섬이지만 지금 인구는 2천명도 되지 않는다.
중노동 끝에 사망한 안토오마루의 선원들
태평양전쟁을 전후하여 일본은 이리오모테 서부 후나우키항 일대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요새를 만들기 위해 주민들의 땅을 빼앗았다. 그리고선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으로 만들어 감시병이 입구에 늘 서 있었다. 이때 주둔한 부대는 후나우키 요새사령부외 제65요새 보병대, 요새중포병연대, 육군병원이 서부군사령관 지휘하에 배치됐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가면 이리오모테를 포기해 많은 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확인된 바로는 이곳에는 소나이, 사령부본부가 있었던 우치바나리섬안, 시라하마 등지에도 위안소가 있었다. 이들 위안소에는 어김없이 조선인위안부가 있었다. 군위안소는 대부분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일본군 요새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 내부에 있었던 군위안부들이 언제 오고갔는지, 위안부 수나 생활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했다.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장교들은 여성들을 선별해 아름다운 여성은 첩으로 삼아 따로 기거하게 하였는데 이런 경우와 위안부들이 간혹 부근을 오갈 때 보았을 뿐이었다. 시로하마에 있는 위안소는 난카이위안소였다. 이에 대해서는 데쓰다 중위의 미간행된 수기가 있다. 그의 글에 따르면 시로하마에 있던 위안소는 장교가 사용한 위안소였고 대만에서 온 일본인 여성이 위안부로서 접객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민들에 따르면, 시로하마의 위안소가 한곳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여기에도 조선인위안부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데쓰다 중위는 우치바나리섬에 있었던 하사관 일반병사를 상대로 한 위안부들을 소노다위안대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그 우치바나리에 있던 소노다위안소를 찾아나섰다. 소나이에서 보트로 출발해 한 15분 정도 가면 우치바나리 해변에 다다른다. 이 섬에 내려 조금 들어가면 류큐인의 민간신을 모시는 장소가 있다. 그곳을 지나 나무와 풀을 쳐가며 겨우 조금씩 이동하니 위안소터가 나타났다. 지금은 벽돌과 건물이 있었던 흔적만 있을 뿐이다. 그뒤 산 정상엔 사령부 터가 있다. 시모나가 겐지 사령부에서 1943∼44년 고용원으로 일했던 나라이 아사노부는 나리야 본부 밑에 위안소가 있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군 고용인이었어도 근방에 가는 것이 금지되어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위안부가 수명이 있었고 그 가까운데 병사 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여성들을 불러 연회를 즐기곤 했던 시모나가 대좌의 숙사는 시로하마 남해탄광 근방 콘크리트집에 따로 있었다고 한다. 아래 계급의 기타무라 중위가 위안부를 첩으로 들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면 시모나가 역시 그러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치바나리엔 안토오마루(安東丸)란 배가 표류한 곳이 있다. 안토오마루의 선원들은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일본군은 귀환시키기는커녕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고된 노동을 시켜서 사망하게 하고 남은 이들을 말라리아가 극성한 이리오모테 동부지역으로 몰아넣어 대부분을 죽게 하였다. 지금도 이 일본군의 잔학행위는 주민들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아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치바나리에서 다시 배로 소나이로 나와 다른 위안소 자리를 찾았다. 기타무라 중대 200명의 병사(兵舍) 근방에도 위안소가 있었다. 현재는 관측소 직원 관사가 되어 있다. 위안소 바로 옆엔 과거 기타무라 중위가 위안부 여성을 첩으로 삼아 살았던 곳이 있는데 지금은 역사자료관이다. 이리오코테 동부의 탄광지역에도 군위안소, 기업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시가키지마는 이에야마의 중심지이다. 오키나와 본섬 쓰지 유곽의 여성들이 군위안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시가키지마에도 그와 같은 것이 있었다. 이시가키지마의 명찰 도림사 맞은편에 바로 그러한 형태의 유곽지대가 있었다. 이 지역에 있는 류큐 전통주택 난슈간의 주인 이토가즈에 의하면 이 거리를 18번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더럽고 여자들 사는 곳이란 부정적 의미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미야코지마는 1945년 3월 하역 작업 중 다수의 조선인 군부들이 미군의 공습에 의해 수장된 사실이 알려져 있는 곳이다. 미야코지마에는 제28사단과 독립 혼성 제59여단 등의 부대가 주둔하였다. 이 부대들은 모두 중국 동북부 이른바 만주에 있던 부대들이었다. 여기에 열군데가 넘는 군위안소가 있었다.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방문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곳의 주민들이 조선인여성들의 모습과 아리랑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바르코시에 살았던 나카사토 기미(65), 치모리에 살았던 미야히라 도미(74)씨 등은 <아리랑>을 노래해 보였다. 이들 증언자의 노래에는 당시 조선인위안부 여성들의 처연했던 모습이 생생히 살아 있었다.
강정숙/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wumright@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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