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2003년10월01일 제478호 

[피터 아넷 바그다드 통신 Ⅰ] 미국은 이라크와 사귀는 데 실패했다

<한겨레21> 독점연재 - 세계적 종군기자 피터 아넷의 바그다드 통신

베트남전부터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이라크 등 40년 넘게 세계 곳곳의 전쟁터를 누벼온 종군기자 피터 아넷. 최근 한국 방문을 마치고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간 그가 <한겨레21>에 르포를 연재한다.

<한겨레21>은 세계적인 종군기자 피터 아넷(Peter Arnett)의 바그다드 현지르포를 다섯번에 걸쳐 독점연재한다.

아넷은 베트남전부터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미국의 이라크 침공까지 40년 넘게 세계 곳곳의 전쟁터를 누비며 취재를 해왔다. 1934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17살에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AP통신 특파원으로 13년 동안 베트남전을 취재했다. 1966년에는 당시 중국 공산주의를 봉쇄하려던 서방 국가의 전선 역할을 하던 라오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음을 알리는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때 전화와 전신이 불통인 상황에서 그는 메콩강을 헤엄쳐 건너 태국으로 가 기사를 송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넷은 기자이던 91년 걸프전 당시 서방 기자로는 유일하게 바그다드에 남아 화염에 휩싸인 시가지에서 전쟁 발발을 세계에 보도했으며, 서방 언론인으로는 처음 오사마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기자로 취재 중이던 올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는 이라크 국영 텔레비전에 출연해 “미국 정부의 초기 전략은 잘못됐다”고 비판해 미국의 ‘애국주의’ 분위기에 떠밀려 해고당했다. 9월 초 한국을 방문해 “전쟁보도에서도 국익보다 진실이 우선임”을 강조했던 그는 곧바로 바드다드로 돌아가 <사담 후세인 몰락의 이면>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다시 취재를 시작했다. -편집자


해가 떠올 무렵, 온 바그다드를 휘감는 포성에 잠을 깼다. 여름 휴가를 마치고 이 도시로 돌아온 지 이틀째였다. 전날 밤 저녁을 함께하며 다시 만난 이라크 친구로부터 세상이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잠이 든 터였다.

폭발물은 몇 블록 떨어져 있는 아이케 호텔의 북쪽 벽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곳엔 미국 텔레비전 방송사의 바그다드 지국이 있었고, 분명히 그것이 표적이었으리라. 폭발로 사망한 미국인은 없지만 현지인 경호원 한명이 목숨을 잃었고 몇몇 사람이 부상당했다. 사흘 새 폭발 사고만 세 번째다.


사진/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온 이후 나는 이곳에 주둔하는 미군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친근감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GAMMA)

“우리가 다음 표적일 거야”

나는 내 숙소이자 많은 미국인들이 머무는 곳인 17층짜리 팔레스타인 호텔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거대한 건설용 크레인이 16피트짜리 콘크리트 블록으로 호텔을 에워싸는 방어벽을 쌓고 있었다. 인근 도로에는 평소보다 많은 미군이 보였다. 오후 늦게 방어벽은 완성되었고, 동료 기자 한명이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가 다음 표적일 거야.”

확실히 바그다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절감해야 했다.

이른 여름 내가 이라크 수도를 떠날 때, 바그다드의 모습은 참혹 그 자체였다. 그 비극의 정도를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도쿄나 베를린 혹은 한국전쟁 이후의 서울에 비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전쟁의 폭격이 유발한 ‘탄환 충격’(기억력·신경상실증을 수반하는 병-역자)에 시달렸고, 종전 이후 범람한 약탈과 범죄, 테러 또한 그들을 괴롭혔다. 일곱달 동안 이라크 사태를 취재하던 나 역시 이 도시를 잠식하는 두려움과 불안에 지쳐가고 있었다. 나는 또 미군 병사들의 바그다드 치안유지 노력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보며 우울해하던 참이었다. 전후 이라크의 미 군정과 정치, 행정은 명백한 실패였다.

나 같은 사람은 전쟁에 지치면 잠시 이곳을 떠날 수 있지만, 전쟁의 원인과 아무런 관계없는 이라크 사람들, 그 2500만의 영혼들은 그럴 수 없다. 이웃나라와의 국경이 견고히 봉쇄돼 있어서 사태가 악화돼도 도망갈 곳이란 없다. 이라크 사람들은 실망과 분노, 절망을 곱씹으며 자신들의 운명을 방기하고 있는 듯했다.

이번주 바그다드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옛 친구들과 지인들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나는 그들이 끔찍한 자동차 폭발 사고와 범죄로 얼룩진 이 여름을 피해 살아남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부시 대통령이 5월1일 성급하게 후세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선언한 지 반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매긴 미국의 이라크 통치 성적표는 몇점인지 알고 싶었다.


사진/ 불타는 후세인 동상. 미군 주둔 이후의 혼란 속에서 “사담은 치안이라도 유지했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피터 아넷 제공)


내 친구 다섯명은 사업가, 청소부, 초등학교 교사, 운전사, 통역사다. 그들 중 바그다드의 미래에 직접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그들은 도시의 행정이나 정치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벗들은 이라크를 안정시키고 부와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려는 미국의 시도가 성공할지 여부를 궁극적으로 결정지을, 침묵하는 다수 이라크인의 일부다.

내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룬스 가족이다. 나는 10여년 전 청소부인 아버지 살만을 내 텔레비전 보도에서 다루며 그들을 알게 되었다. 가족은 바그다드 시내 중심가의 번잡한 셰이크 오마르 지역에 위치한 소박한 집에 살고 있다. 그 지역은 주요 공격 목표 중 하나여서, 나는 전쟁 내내 그들이 잘 있는지 걱정해야 했다. 폭격이 매일밤 그들의 창문과 벽을 뒤흔들 때, 부모와 아이들은 계단 아래 숨어서 17살 된 딸 누라가 큰 소리로 이슬람 경전 코란을 읽는 것을 들으며 견디고, 살아남았다.

몇 가지 긍정적 변화가 있었지만…

아무도 청소부 월급을 주지 않았기에 그들의 아버지는 종전 뒤 내내 실직 상태이다. 집세가 밀린 지금도 아버지 살만은 전쟁으로 인한 경제 파탄으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이라크 인구 70% 중 한명이다. 살만은 근처에 있는 셰이크 오마르 사원에 매년 순례를 오는 이웃나라 사람들에게서 팁을 받아 생활하려 했지만, 점점 위험해지는 바그다드의 치안 상황은 올해 순례자들의 방문마저 앗아갔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수백만명의 이라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룬 가족은 집세 낼 돈도 없이 아주 조금의 음식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더욱이 살만의 실직보다 더 비극적인 사건이 이 가족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딸 누라는 소꿉친구이자 경찰관인 라오프 자심이라는 젊은 청년과 약혼한 사이로 올해 단출하게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라오프는 올 여름 내내 바그다드를 덮친 폭력의 물결에 휩쓸려버렸다. 그 젊은이는 납치된 뒤, 부모가 범인들이 요구한 몸값을 대지 못해 살해되었다. 납치뿐만 아니라 강간과 살인 같은 강력 범죄가 급속히 증가했지만 새롭게 모집된 이라크 경찰은 이제야 어떻게 손을 써보려 시작하는 참이다.

내가 살만 가족을 만났을 때 누라는 검은 상복 차림이었다. 약혼자 무덤이 있는 바쿠바 지역까지 매주 갔다온다고 했다. 요즘 같은 위험한 때는 그곳에 가는 일 자체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이 나라에서 안전하게 살기란 이제 글렀다”며 살만은 분노를 터뜨렸다. 수백만명의 이라크인과 마찬가지로 살만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체념하다시피 받아들였고 미국이 조속히 이라크 재건을 할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기에 사담 정권의 몰락에 환호했었다.

“사담 후세인은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쓰고 우리에게 거의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살만은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하다못해 치안이라도 유지했다. 지금 이라크에서 그런 치안을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일자리는 다 어디 갔는가?” 몇 시간 뒤 바그다드의 다른 지역 한 공장 벽에서 나는 새로운 구호를 발견했다. “사담 없이는 치안도 없다.” 그런 부질없는 기대란…. 이라크의 불확실한 미래에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도주 중인 사담 후세인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고 바그다드를 돌아다니며 나는 떠나기 전에 비해 몇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있음을 알아챘다. 일단 도시가 깨끗해졌다. 가게 주인들은 다시 위엄을 찾은 듯하고, 거리의 쓰레기와 먼지, 전쟁의 잔해들이 치워졌다. 상품 진열창은 다시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직 살 만한 물건은 별로 없었지만, 몇주 전과 달리 뭔가를 팔려고 하는 상혼은 느낄 수 있었다.

이라크 경찰은 이제 도처에 있었다. 내 운전사 야시르 아흐메드는 이전 사담 때의 부패한 경찰과 달리, 미국이 훈련시킨 새로운 경찰은 주민들을 친절히 대할 줄 안다고 말한다. “교통경찰이 딱지를 떼는 것은 똑같지만, 뇌물을 주지 않는다고 유치장에 집어넣을 거라는 협박을 하진 않는다”고 그는 전했다.

장난치는 미군과 아이들은 더 이상 없다.

거리에는 윤이 나게 닦인 차들이 지나다녔고, 이는 이른 여름 고속도로를 메웠던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상태의 누더기 차들과 대조를 이뤘다. 바그다드 운전자들이 그들이 가진 여러 대의 차 중 좋은 것들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자동차 강도의 위협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사업상 알게 된 타메르 사디 부니아의 아들이 가진 레저용 차량은 6월에 공격받았고, 타메르 자신 소유의 벤츠도 7월에 털릴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요즘은 거리에 그런 걱정을 하고 나가진 않는다”고 타메르는 내게 말했다. “요즘은 늦은 밤에도 차를 몰고 나간다. 올 초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나아졌을 뿐이다. 한 꺼풀만 벗기면 상황은 더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월에 전쟁을 시작하며 미국은 모든 이라크 사람들이 이전 정권을 혐오하기 때문에 이라크 사람들이 두 팔을 벌리고 그들을 환영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은 이라크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온 이후 나는 이곳에 주둔하는 미군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친근감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휴가를 떠날 때만 해도 동네 아이들 여럿이 미군 초소나 차량을 에워싸고 껌을 구걸하거나 캔 음료수를 파는 모습을 쉽사리 볼 수 있었다. 군인들도 그런 시간을 즐기는 듯했다.

서로 웃고 장난치는 미군과 아이들은 더 이상 없다. 미국인들은 그렇게 하기엔 너무나 많은 아군이 친근하게 접근하던 이라크 사람들에게 살해되었다고 느낀다. 육교 위에서 지나가는 군용 지프 차량에 수류탄을 던지고, 군중이 혼잡한 틈을 타 바로 옆에서 암살하고, 원격 조종 장치를 사용해 원거리에서 저격하는 일 등이 흔히 일어났다.

종전이 공식 선언된 5월 이후 80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공무 중에 사망했다. 미국 관리들은 이를 군정을 교란 혹은 전복하려는 사담 추종자들과 국제적 테러범들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그들이 폭력의 일부임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몇몇 주요 차량 폭탄 테러는 그들의 소행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른바 ‘수니 삼각지대’를 이루는 바그다드 서쪽과 북쪽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는 극렬 사담 추종자들의 최후의 발악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태에는 분명히 다른 요소도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이라크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불만, 즉 미국이 약속한 재건과 정치적 발전이 실현되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이다. 이라크는 무장된 국가이기에 어느 집에나 라이플총을 구비하고 있다. 그리고 수천명의 이라크 병사들이 3, 4월 미국이 바그다드에 입성할 당시 전장에서 총을 들고 증발해버렸다. 그들에게 군사적 전문지식뿐 아니라 공격할 만한 동기 역시 존재한다는 것은 급증하는 미군 피해 통계가 증명해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라크군’

미국이 이라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현지 문화와 언어에 무지한 외국군과 그들의 삶이 나아지리라 기대했다가 참을 수 없게 된 이곳 사람들 사이의 필연적인 충돌이다. 오해에서 비롯된, 혹은 사고나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고의로 야기된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이 여러 번 일어났고, 이런 일들은 미국의 존재에 대해 어마어마한 의심으로 귀결되었다. 헬멧과 방탄조끼로 무장한 미국 병사들은 이라크인들에게 친근하기보다는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상황은 미군뿐만 아니라 이곳에 파견된 다른 외국 군대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라크 사람들은 부시 대통령이 군정 통치와 정치적 관리의 부담을 덜기 위해 국제사회에 손을 벌리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국 관리들은 다시 이라크 재건에 유엔을 개입시켜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오는 상당수의 전투병을 이용해 미국의 부담을 줄여보려고 한다.


사진/ 이라크 게릴라의 폭탄 공격으로 폐허가 된 유엔사무소 건물. 그들의 공격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SYGMA)


그러나 이라크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군인이라고 미국 군인보다 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할 만한 이유는 없다. 남부 이라크에서 영국군들이 사망했고 바그다드의 유엔 주재 사무소 역시 지난 몇주 사이 두번이나 공격받았다. 과도통치위원회에 속하는 이라크 인사들에서부터 거리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한목소리로 외국군 배치보다 이라크군과 경찰의 추가 투입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 통역 알리 바라리는 이라크에 더 많은 수의 외국군을 파견하는 것은 애초에 목적한 치안 개선의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소중한 재원만 낭비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라크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라크군이지 외국군이 아니다. 우리 경찰들은 바그다드 치안 유지에 성과를 거두고 있고, 또 우리의 군대는 지방을 책임질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사업가로서 이웃나라를 종종 오가는 내 친구 타메르는 미국 사람들이 이라크를 이라크 사람들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동시에 미국이 이라크 국경 통제와 ‘수니 삼각지대’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나라를 방어할 준비가 별로 되어 있지 않다. 앞으로 수년간 미국이 우리에게 보호 우산을 씌워줘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부시 대통령의 고집스러운 주장은 부시 행정부의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비전, 9·11 테러 이후 나온 ‘팍스 아메리카’의 입장을 반영한다. 이 견해는 상대 국가의 직접적 도발행위가 없을 때도 선제공격으로 전쟁을 시작하는 전술을 정당화한다. 미국 정부에게 이라크전과 이후의 유혈사태는 베트남전 이후 가장 중요한 일이다. 비록 미국 내에서 지지도는 떨어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라크 위기가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려야 한다는 부시의 주장, 나아가 이라크를 놓치는 것은 이 지역과 미국의 명성에 재앙이 될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다.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군사 분석가들에게 미국의 이라크 개입과 베트남전을 비교하는 것은 점점 더 매력적인 일이 돼가고 있다. 베트남전 초기 상황,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시절을 비교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나는 베트남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취재했다. 베트남에서는 국제공산주의와 싸웠지, 국제 테러리즘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초기 전투의 초점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이 표현은 베트남에서 유래하여 이라크에서 다시 쓰이고 있다.

베트남전은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은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세 나라에서만 전투병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라크전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은 미국으로서는 꼭 이겨야 하는 전쟁이었다. 미국의 논리상 베트남에서의 패배는 동남아시아 전체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이는 이라크에서의 패배는 중동지역 전체에 테러리즘이 만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논리와 흡사하다.

미국의 초기 군사전략은 효과적인 남베트남군을 조직하는 것이었지만, 이 계획이 실패한 뒤 미군이 베트콩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초록색 군복을 입은 이라크 군인들은 자신들이 저항을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아직 증명하지 못했다.


사진/ 바그다드 시내 미군 탱크 앞에 선 필자. 그는 “전쟁 보도에선 국익보다 진실이 우선”이라고 강조해 왔다.(피터 아넷 제공)


베트남에서 미국의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정책 입안자들은 남베트남에 ‘새로운 남한’을 만든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노력을 정당화하고는 했다. 남베트남은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을 거치며(동서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미국이 지원을 늘리면서- 역자) 강화된 국가였다. 미국은 오늘날 ‘민주적인’ 이라크 건설은 중동 지역의 권위주의 국가들에게 긍정적 자극을 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비평가들은 베트남의 해저 석유 잠재 보유량이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관심사였다고 보고 있다. 이는 마치 이라크의 석유가 오늘날 이라크에서 미국이 벌이고 있는 일의 주요 원인으로 여겨지는 것과 흡사하다. 베트남의 석유 추정 보유치는 아직 실제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이라크의 석유 보유고는 증명되었다. 베트남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본국의 미국인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파병 숫자와 비용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게 되었다.

그래도 ‘웨딩 마치’는 계속된다

베트남과 이라크 두 전쟁의 중요한 차이는 전자가 민족주의적·탈식민지적 혁명을 무기력화하려는 헛된 시도에서 시작한 전쟁이었다면, 후자는 이미 쇠약해지고 신임받지 못하는 독재를 무너뜨리려는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기자 생활을 하며 20개의 전쟁을 취재했다. 그리고 이라크는 어떤 전쟁보다도 비극적이다. 베트남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죽었고,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전쟁은 더 오랜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이라크 사람들은 지난 30년 동안 절대적 복종과 희생을 강요하는 잔인한 정권 아래서 세개의 전쟁을 겪지 않았는가.

미국은 1991년 걸프전 직후 사담 정권을 무너뜨릴 기회를 한번 놓쳤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사담 본인도 살려놓았다. 지난 10년간 지속된 강력한 국제적 경제 봉쇄는 정권을 붕괴시키려고 고안된 것이었지만 보통 사람들이 가장 심한 고통을 당했다. 당시 외부에서는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사담 후세인은 분노한 국민들에 의해 쫓겨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담은 자신의 국민들이 거지가 되는 상황에서도 풍요롭게 살았고, 사담이 권좌에서 쫓겨난 지금도 사람들의 비참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오늘 절망적인 바그다드의 그림을 그렸고, 이것은 정확한 묘사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위기를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그다드로 돌아온 지 둘쨋날은 기자들이 머무는 호텔에서의 폭발음으로 시작해 팔레스타인 호텔의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는 것으로 저물었다. 멋진 신랑 사이드 하산은 아름다운 신부 와슨 알리와 수십명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며, 동네 악단의 웨딩 마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결혼했다. 결혼식 참석자들은 안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차량 통행이 금지돼 호텔까지 무려 세 블록을 걸어와야 했다. 악단은 휘날리는 웨딩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보안요원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는 내내 음악을 연주했다. 신랑 신부는 위압적인 보호벽과 미군 탱크를 넘어서야 호텔에 들어왔고 자신들의 피로연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나는 밖으로 걸어나와 호텔 밖의 먼지로 뒤덮인, 총알자국이 선명한 거리 위에 색종이 조각들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삶은 계속된다.


피터 아넷 | 종군기자 (사진/ 강재훈 기자)



  • [피터 아넷 바그다드 통신 Ⅰ] 원문보기(번역/서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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