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1세기엔 ‘꿈의 벼’가 익는다한가위를 맞아 살펴보는 쌀의 과거·현재·미래… 세계는 지금 쌀 유전자 전쟁 중
‘광 속에 있던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등 너머 밭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보리 팰 무렵의 5, 6월은 넘기 힘든 보릿고개였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겨레와 함께한 쌀-도작(稻作)문화 3000년’ 특별전(9월17일까지)은 60∼70년대 굶주림에 허덕이던 시절을 이런 짤막한 설명을 덧붙여 스치듯 보여주고 있다. “배 꺼질라 뛰지 마라” 하던 때는 ‘그때를 아시나요’류의 아득한 옛 풍경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대목은 동시에 쌀이 단순한 먹을거리를 넘어 우리의 삶 자체였음을 보여준다. ‘밥이 하늘이다’, ‘펄펄 뛰는 살아 있는 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 속에도 쌀은 전통문화의 원형으로 스며 있다.
수입개방, 빗장은 서서히 풀리고…
전시장 들머리에 걸린, 성기를 드러낸 남자가 밭을 가는 모습의 기원전 4∼3세기 농경문청동기는 여전히 푸르른 그 빛으로 지금 우리에게 쌀은 무엇인가를 묻는 듯하다. 이번 전시회는 1929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쌀이 강제수탈되던 때는 물론 거슬러올라가 한강유역 곡창지대를 서로 차지하려는 삼국시대 권력투쟁의 역사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전시회를 찾는 발길은 뜸하다. 이제 쌀이 더이상 ‘겨레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일까? 농축산물 수입이 죄다 개방된 지금 쌀은 빗장이 풀리지 않는 유일한 품목이다. 하지만 쌀이라고 수입개방의 파고를 비켜갈 수는 없다. 95년 우르과이라운드협정에 따라 정부는 2004년까지 농업보조금을 해마다 750억원씩 감축하고 있다. 이는 쌀 수매량 감소와 수매가 동결로 이어져 쌀 수출국들의 의도대로 농가의 쌀 재배 의욕을 떨어뜨리고 있다. 농림부는 쌀농사 5㏊를 지으면 1천만원의 농가 잉여소득이 생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농사를 짓겠다며 논을 사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가위를 앞둔 지난 9월1일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화전리 이상용(48)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논 한평에 5만원이 넘는데 1마지기에 4가마 정도 소출된다. 1가마에 17만원 받아서는 논 사려고 빌린 돈의 이자갚기도 벅차다. 어차피 대대로 내려온 논이 있어서 짓는 것이지 빚내서 논을 샀다면 곧장 보따리싸야 한다.” 들녘에서 이삭이 주렁주렁 매달린 벼를 보기만 해도 풍성한 느낌이 들던 때는 이미 흘러간 옛날이다. 특히 일본이 지난 4월 쌀 수입을 완전개방함에 따라 이제 쌀 개방에서 예외를 인정받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다. 우르과이라운드협상에 따라 쌀은 단계적으로 2004년 4%까지 개방하도록 돼 있지만 전문가들은 2005년 이후 우리도 완전개방 시대를 맞게될 공산이 크다고 전망한다. 농촌경제연구원 김명환 박사는 “3년 전 농경연이 외국 쌀과 우리 쌀의 맛을 분석했는데 중국 쌀이 1위, 전북 동진쌀이 2위, 미국 캘리포니아 쌀이 3위, 경기 추청 쌀이 4위를 했다”며 “값싸고 맛있는 중국 쌀의 강력한 도전 등 개방되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내다봤다. 개방을 막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쌀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쌀 생산량은 지난해 526만3천t으로 세계 12위다. 올해 생산목표는 3530만석. 지난해 전체 농가 176만 가구 중 벼 재배 가구는 79만호로, 벼농사를 짓는 농가는 두집에 한집뿐이다. 이는 영농규모화와 맞물려 있다. 쌀 전업농 7만1천가구 중 5㏊ 이상 대규모로 짓는 농가는 6197가구로 95년의 1500가구에 비해 크게 늘었다.
혼식을 장려하던 그때 그 시절
농가인구는, 아직 빈곤에 허덕이던 지난 70년 1400만명에서 지난해 420만명으로 30년 새 3배 이상 크게 줄었다. 그동안 우리 쌀이 겪은 사회경제사는 한국현대사의 격동에 못지않게 환호와 좌절이 뒤엉킨 변화의 연속 그것이었다. 쌀 부족때문에 도시락을 일일이 검사해 쌀밥을 도시락으로 싸온 아이들은 선생님한테 혼쭐나기 일쑤였고, 71년에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에는 음식점에서도 쌀밥 판매를 할 수 없게 했다. 이런 보릿고개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낸 것은 ‘녹색혁명’으로 불린 통일벼 개발이였다. 71년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이 육종에 성공한 통일벼는 식량난에 허덕이던 국민들에게 차라리 복음이었다. 워낙 근본바탕이 달라 인연이 먼 탓에 번번이 실패했던, 인디카형과 자포니카형 품종의 교잡에 성공한 게 통일벼였다.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 최해춘 수도육종과장은 “신품종이 나오면 10년 뒤에나 그 품종의 재배면적이 10만㏊쯤 되는데 통일벼는 보급을 시작한 지 2∼3년 만에 재배면적이 30만㏊에 이를 정도로 급속히 퍼졌다”며 전국 들녘을 휩쓴 통일벼 선풍을 뒤돌아봤다. 벼 도안이 새겨진 50원짜리 동전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통일벼는 일반 품종에 견줘 쌀 수확량을 40% 이상 대폭 높인, 우리쌀 역사에서 굵은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당시 통일벼 육종에 참여했던 허문회 교수(서울대)는 “겨울철에는 통일벼 품종을 따뜻한 필리핀으로 보내 재배했다. 그런 뒤에 봄에 모심기 직전 비행기로 다시 공수해와 논에 뿌렸다”고 절박했던 식량난을 회고했다. 하지만 쌀 자급까지는 더 기다려야 했다. 몇 차례 가을을 보내고 나서도 좀체 오지 않던 쌀 자급은 마침내 75년에 달성됐다. 이어 77년 쌀 4천만석 생산이 돌파됐고 66년부터 금지돼 왔던 쌀 막걸리가 그 해에 풀렸다. 자급을 넘어 ‘증산 수출건설’이란 구호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77년 말에는 실제로 남아도는 쌀 7만t을 인도네시아에 꿔주기도 했다. 하지만 79년 전국을 덮친 이삭도열병과 이에 겹친 80년 극심한 냉해는 병충해와 냉해에 가뜩이나 허약한 통일벼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80년 냉해는 60년대 수준보다 낮은 쌀 생산량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80년부터 82년까지 해마다 외국에서 100만t 안팎의 쌀을 또다시 사먹어야 했다. 게다가 끈기가 떨어져 밥맛이 없다는 약점은 통일벼를 더욱 ‘찬밥신세’로 몰아갔다. 소비자들이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통일벼는 80년대 초반부터 점차 들녘에서 사라지기 시작해 90년 들어서는 더이상 심지 않게 됐다. 눈물겨운 굶주림에서 국민들을 해방시킨 통일벼는 그렇게 우리 논에서 떠났다.통일벼 이후, 쌀 품종은 ‘수확량’에서 ‘맛’으로 바뀌었다. 일반미라는 말도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낟알이 둥글고 투명하면서 밥맛이 좋은 자포니카형 일반미를 갸름하고 길쭉한 통일벼와 차별화한 것이다. 현재 벼 품종으로 농가에 보급되고 있는 것은 101가지다. 이 중 일미벼, 동안벼, 대산벼, 화성벼, 일품벼, 추청벼(아키바리), 봉광벼(아키히카리) 등이 재배면적 상위권에 든다. 추청과 봉광 2종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다.
한해 한 사람당 1.2가마 먹는다
우리 국민 한 사람이 지난해 1년 동안 먹은 쌀은 96.9kg(1.2가마)이다. 이는 80년의 1인당 쌀 소비량 132.4kg에 견줘서는 4분의 3으로, 89년에 비해서는 20.1% 줄어든 것이다. 그럼에도 벼 품종은 미래 식량위기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작물시험장은 옛 통일벼를 개량한 초다수확 품종으로 첨단 안다벼를 개발해둔 상태다. 수확량이 통일벼보다 150% 이상 더 많은 이 안다벼는 종자로만 2천t을 생산해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작물시험장 최해춘 과장은 “앞으로 식량문제가 터지면 남쪽 곡창지대에 대대적으로 보급할 예정이다. 지금은 수확량이 ㏊당 8t까지 나왔다. 우르과이라운드협정에 의한 우리 쌀 보호가 끝나는 2004년까지 10t으로 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 안다벼도 통일벼를 개량한 것이지만 일본 역시 식량무기화에 대비해 통일벼 볍씨로 육종을 연구하고 있다. 쌀도 맛과 품종에 따라 이제 차별화되고 있다. 그동안은 정부수매가 품종에 관계없이 이뤄지면서 서로 섞이다보니 어떤 품종인지 또 언제 정미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정부미’는 국가가 수매한 쌀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햅쌀이 아닌, 비축해뒀다 나온 쌀이란 의미에서 일반미와 구별해 소비자들이 그렇게 부르기도 한 것이다. 농촌경제연구원 박문호 박사는 “우리 쌀은 대충 3등품으로 품질이 균일화돼 있다. 수확기에 정부가 품종이나 품질과 관계없이 무조건 사들이면서 빚어진 것이다. 이는 계약재배를 잘 안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성행하는 쌀전문 인터넷사이트들은 이 부분을 살려 소비자들에게 파고들고 있다. 쌀은 산지별로 상표가 400여개나 된다. 임금님표이천쌀, 철원오대쌀, 장수메뚜기쌀, 여마표여주쌀 등이 인기다. 90년대 들어 건조, 도정, 포장과정이 모두 미곡종합처리장에서 일괄 자동처리되면서 방앗간도 사라졌지만, 이제는 싸전도 인터넷이 대신하고 있다. 농협 농산물 전문 사이버쇼핑몰인 인터넷 하나로클럽(www.shopping.nonghyup.co.kr)에서는 하루 1억원어치 이상의 쌀이 거래된다. 이 사이버 쌀 도매시장은 지난 2월 하루 매출이 3억6천만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유색미·인삼쌀 등 특수미 인기
해드림쌀(www.ssal.co.kr)은 농부 이종우씨가 충남 천안시 성환읍 일대에서 생산한 쌀(해드림쌀은 이씨가 붙인 상표)을 소비자와 직거래하는 사이트다. 이 사이트는 파는 쌀의 품종을 자세히 소개하고 인터넷상에서 주문을 받은 뒤 벼를 찧어 쌀을 배달해준다. 품종별 맞춤 즉석 정미소로 운영되는 쌀 판매 사이트도 있다. 미사랑인들(www.misarang.co.kr)은 일품벼, 일미벼, 오대벼, 서안벼 등 한국을 대표하는 6가지 벼 품종 가운데 원하는 품종을 주문받아 즉석에서 빻아 배달하고 있다. 철저한 상품의 하나로서 시장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주곡’인 쌀의 현재 모습이다.밥짓는 냄새가 구수하고 진한 향기나는 쌀(향미벼)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른바 특수미의 대표주자다. 흑자색을 띠어 까만쌀 또는 약쌀로 불리는 유색미는 몸 속의 과다한 산소를 제거해 항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품종은 아니지만 버섯쌀은 쪄서 식힌 보통쌀에 버섯균을 배양한 뒤 일정기간 건조시킨 것으로 고소한 맛이 난다. 쌀 표면에 인삼 농축액으로 피막을 입힌 인삼쌀도 선을 보인 지 오래다.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우리 쌀은 이제 환경농업과 ‘꿈의 쌀’을 개발하기 위한 유전자 벼 품종개발로 나아가고 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화전2리 120여 농가 중 48개 농가는 7만여평의 농사를 오리농법으로 짓고 있다. 논마다 풀어놓은 수십마리의 논오리가 이삭이 패기 직전까지 벼 사이로 둥둥 떼지어 떠다니며 해충을 잡아먹고 잡초들을 뜯어먹는다. 벼는 너무 질겨 먹지 않는다. 물만 가둬두면 될뿐 농약을 뿌릴 필요도 없다. 친환경농법으로 생산된 이 무공해 쌀은 일반 쌀보다 7만원 정도 비싼 값에 팔린다. 정부도 내년부터 논농업 직불제를 실시해 농약을 적게 치고 비료를 덜 쓰는 농업을 하는 친환경농가에는 ㏊당 30만원씩 지원해줄 방침이다. 직접적인 농업보조금을 금지하고 있는 WTO체체에서 논농업 유지를 위해 정부가 간접적으로 벼농가를 지원해주는 것이다. 세계는 지금 쌀 유전자 전쟁을 치르고 있다. 쌀이 주식인 우리도 인간 게놈프로젝트에는 뒤처졌지만 쌀 유전자 연구에는 일찌감치 뛰어들었다. 94년부터 농업과학기술원 은무영 박사팀을 주축으로 연구를 시작해 꿈의 쌀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선보일 꿈의 쌀은 햇빛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도록 곧추선 잎새와 크고 탐스런 이삭이 벼 허리가 휘어지도록 매달린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은 박사팀은 미국, 일본 등 10개국 컨소시엄으로 구성된 국제벼게놈프로젝트(IRGSP)에 98년부터 참여하고 있다. 유전자변형 쌀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은 박사는 “아직 보급된 상태는 아니지만 우리도 유전자 변형 쌀을 실험실 수준에서 이미 개발한 상태”라며 “통일벼를 개발할 때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육종기간을 유전공학으로 크게 단축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