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너희가 WTO를 아느냐농산물 수입 이전보다 51.2%나 증가, 우리 작물의 가격을 사정없이 흔든다
“호박값이 폭락하면 오이로, 오이가 폭락하면 토마토로 무분별한 수입개방을 피해 이쪽저쪽으로 농민들은 작목을 옮겨다니고 있다. 농사철마다 무엇을 심어야 할지 막막하다. 그동안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생산기반은 동요하고 있다. 땀흘려 길러온 농산물을 제 손으로 갈아엎고 있는 우리 농촌은 적막함으로 가득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최진국 정책위원장의 말은 세계무역기구(WTO)체제 5년,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한국농촌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식량자급률 26.4%로 폭락
농산물 전 품목의 예외없는 관세화를 내세운 우루과이라운드협정에 따라 고추 마늘 참깨 등 주요 작물은 95년에 완전개방됐다. 닭고기와 돼지고기는 97년에 개방됐고 아직 빗장이 풀리지 않은 품목은 쌀과 쇠고기뿐이다. 하지만 쇠고기도 내년 1월부터는 완전개방된다. 마지막 남은 쌀은 올해 2%에 이어 단계적으로 2004년에 4%까지 개방된다. WTO가 우리 농촌에 끼친 영향은 먼저 수치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95년 당시 2180만원이던 농가소득은 지난해 2230만원으로 거의 정체상태를 보이고 있다. 값싼 외국산 농산물이 마구 들어오면서 국내 농산물 가격이 폭락한 데 따른 것이다. 농협중앙회 조사를 보면 WTO 출범 이후 농축산물 수입액은 이전에 비해 51.2%가 늘었다. 이는 세계평균인 32%를 훨씬 웃도는 것이다. 수입증가는 과채류에서 두드러진다. 과실류는 68.7%, 채소류는 무려 156.6%의 높은 수입증가를 보이고 있다. 포도의 경우 수입액이 94년 568만달러에서 지난해에는 무려 3500만달러로 늘었다. 마늘 역시 93년 58만달러에서 지난해 1500만달러로 수입이 크게 증가했다. 농협중앙회 해외협력실 최찬우 팀장은 “WTO는 이른바 케언즈그룹(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 18개 농산물 수출국)이 자국의 잉여농산물을 처리하기 위한 체제”라고 규정한 뒤, “무역자유화의 이익이 다국적 기업과 선진국에 돌아가고 국가간 불균형은 심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품목의 수입증가는 해당품목뿐만 아니라 대체품목의 가격까지 한꺼번에 흔들고 있다. 올 봄 캘리포니아산 오렌지의 부문별한 수입은 방울토마토, 참외, 딸기 등 과일값 폭락은 물론 양파와 감자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작물의 가격 하락을 불러왔다. 이제야말로 농가들이 WTO체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농촌을 떠나는 농민도 급격히 늘어 90년대 초 700만명이던 농민은 현재 420만명으로 줄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식량자급률도 낮아지고 있다. 90년에 40%를 웃돌던 식량자급률은 96년에 26.4%로 떨어지기도 했다. 수입개방으로 인한 농산물값 폭락은 농가소득 감소를 불러온다. 이는 도시가구 소득과 견줘보면 뚜렷이 나타난다. 94년에는 도시가구와 비교한 농촌가구의 소득이 99.5%로 비슷했으나 지난해는 83.6%로 떨어졌다. WTO는 국민들의 건강을 위협하기도 한다. 수입농산물 검역에서 WTO가 신속한 통관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수입농산물의 잔류농약 검사기간은 80년대에 45일이었던 것이 10일로 대폭 줄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청 관계자는 “검역을 오랫동안 꼼꼼하게 하면 WTO가 자유무역을 간접 규제하는 일종의 무역장벽이라면서 제재를 가한다. 그래서 점차 검사기간이 줄어 10일로 대폭 단축된 것”이라고 말했다.
검역 간소화 요구, 국민건강 위협
정밀검사 기간도 WTO 출범 이전 40일에서 지금은 7일로 줄었다. 최초로 수입되는 농산물이나 외국에서 문제가 됐던 경험이 있는 농산물은 정밀검사를 받는다. 그런 만큼 검사가 더욱 철저해야 하지만 검사기간은 줄어든 데 비해 수입농산물의 잔류농약 검사항목은 오히려 늘고 있다. 밀의 경우 80년대에는 90여 항목에 걸쳐 검사하면 됐으나 지금은 200여종으로 늘었다. 수박겉핥기식 검사가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터진 벨기에산 쇠고기 다이옥신파동에는 정밀검사기간 단축도 한몫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WTO 회원국으로서 우리나라는 수입농산물의 검사제도와 관행을 낱낱이 WTO에 통보해야 한다. 우리가 식품위생기준을 바꾸면 즉각 이를 보고해야하고 WTO에서 자유무역정신에 위배되는 규제라고 판정을 내리면 다시 고쳐야 한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 관계자는 “우리는 선검역 후통관이고 미국은 선통관 후검역인데 미국은 선통관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검역기간이 길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다반사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난 97년 미국이 소를 비롯한 도축상태 수입원료육에 대해서는 검사를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O-157검사는 계속 하되 일반세균 검사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 검사대상에서 제외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WTO 안에서도 국가별로 이해가 엇갈리고 있는 유전자조작농산물(GMO)도 우리나라 소비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수출국들은 GMO표기를 협정위반으로 해석하고 있다. 농림부는 일단 내년부터 수입되는 콩 옥수수 두부 간장 등에 GMO 여부를 표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이 이를 기술적인 무역장벽이라며 무역보복을 가할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 만큼 농림부도 각국의 동향을 살피며 미온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 농가를 파탄에 빠뜨리고 있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WTO가 허용하고 있는 농산물 직불제다. WTO는 각 국가가 높은 값을 매겨 농산물을 사들여주는 방법으로 가격을 지지하거나 시장에 영향을 끼치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생산량과 가격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에서는 보조를 허용하고 있다. 이른바 ‘허용보조’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은 허용보조의 하나로, 농가에 소득을 직접 보조해주는 농산물 직불제를 도입해 자국 농민들의 농업소득을 지원해주고 있다. 이를 통해 값싸게 잉여농산물을 수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나라 같은 수입국 농민들의 피해로 돌아온다.
부실기업엔 공적자금을 쏟아부으면서…
농림부는 “미국이나 유럽 등 농산물 수출국가들은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다양한 보조정책수단을 써 농가소득의 20∼40%까지 지원해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IMF 위기 등으로 인한 예산제약 때문에 이제야 시작하는 단계다”고 말했다. 농림부는 내년부터서야 비료와 농약을 적게 쓰는 환경농업을 조건으로 논농업 직불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그나마 농업직불제 예산은 고작 2900억원이다. 이는 농가소득의 1%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은 가격지지를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직후 생산중립적 직불제로 재빨리 전환해 WTO체제에 맞는 형태로 바꾸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농협 최찬호 팀장은 “우루과이라운드협정이 허용하고 있는 직접지불제도는 예산이 풍부한 선진국들만을 위한 농업지원정책”이라며 “‘공정한 농산물 농산물무역체제 확립’은 포장된 말일 뿐 경량급과 헤비급 권투선수를 한 링 안에 밀어놓고 공정하게 싸워보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통계는 최 팀장의 말을 뒷받침해준다. WTO출범 이후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농산물 수출국들은 농산물 무역흑자가 30∼97%까지 증가한 반면 우리나라는 농산물 무역적자가 39%나 늘었다. WTO 수입개방 파고 속에서 농민의 주름살은 깊어만 가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부실은행이나 부실기업에는 공적자금을 수백조원씩이나 쏟아부으면서 농민은 죽은 개 취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WTO에 제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정부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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