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기획] “농업을 포기하라” WTO체제 5년, 농정실패와 농산물수입이 농민들에 떠안긴 빚, 빚, 빚!
농산물을 포함한 모든 상품의 대폭적인 수입개방을 내건 우루과이라운드(UR)와 이로 대표되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 출범 5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농민들은 지난 7월25일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개방농정 철폐’를 외치며 전국농민대회를 열었다. 삼복더위에 농민대회가 열린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무엇이 농민들을 뜨거운 아스팔트로 내몰았을까? 지난 7월27일 찾아간 충남 부여군 초촌면 신암리 강경선(43)씨의 집은 전형적인 시골의 여름정취를 느끼게 했다. 집 앞마당 너머에 펼쳐진 논마다 팰락말락하는 벼 이삭이 보기만 해도 시원스러웠다. 흐르는 땀을 훔치며 한숨 돌리고 있는데 강씨가 대뜸 뭔가를 꺼내 보였다. 영농 및 생산자금 800만원, 농업생산자금 500만원, 전문농업인경영자금 500만원. 농협에서 날아온 상환독촉장이었다. “이 빚은 내일모레까지 당장 갚아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로 내가 진 빚은 6천만원이 넘어요. 빚을 꿀 때 나한테 연대보증을 서준 사람이 대여섯명인데 다 이 동네 40, 50대 농민들이지유. 내가 빚을 갚지 못해 파산하면 호박 넝쿨째 딸려가듯 같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 말씨와 충청도 말씨를 뒤섞어 쓰는 강씨는 자신이 쓰러지면 마을 자체가 끝장나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거미줄처럼 얽힌 연대보증의 사슬
어떻게 빚이 그렇게 눈덩이처럼 늘었느냐고 강씨에게 물었다. 강씨는 대답 대신 원망스런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판쪽으로 가리켜보였다. 비닐지붕이 찢겨진 채로 버려진, 마당 앞 시설하우스 2동이 김씨의 손가락 끝에 있었다. “정부가 중소농 고품질사업을 하라며 시설비 일부를 지원해준다기에 4천만원을 들여 저 시설하우스를 설치했습니다. 1500만원은 정부가 지원해주고 나머지 2500만원은 내 돈을 들였지유. 저 하우스에 딸기농사를 지었는데 3년도 채 안 돼 망쳤어요.” 강씨의 원망은 점차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정부가 재배작물의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면서 대대적으로 농촌에 보급한 1-2W형 시설하우스였다.
빚만 늘린 천덕꾸러기, 시설하우스
강씨는 논농사도 70마지기를 짓고 있다. 하지만 논에서 생산되는 것도 빚뿐이다. “논 한평에 2만5천원 하는데 쌀 1가마에 16만원밖에 못 받지 않습니까. 지금 쌀 마진이 얼만지 알아요? 고작 5%지유. 논을 사려고 빌린 돈의 이자는 12%인데 16만원 받아서는 이자의 절반도 못 갚습니다.” 빚은 갚아야 하는데 갚을 돈이 없다보니 빚을 위해 또다시 빚을 내야 한다. 물론 그동안의 이자까지 갚으려면 이전보다 더 많은 빚을 꿔야 하므로 해마다 빚이 그만큼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빚서류 두께에 비례해 부채가 불어나는 것이다. 초촌면에서 차로 30여분쯤 떨어진 부여군 세도면 가회리에서 만난 조남립(40)씨도 처음 꺼낸 얘기가 빚이었다. 세도면은 대규모 방울토마토 생산지역이다. “1억5천만원 이하는 이 동네에서 빚도 아니지유. 세도면 전체 농가의 빚이 500억원입니다. 마을 사람들마다 방울토마토 시설하우스에 1억 정도씩 투자했는데 지금 하우스를 팔면 4천만원도 못 받아유. 방울토마토 값이 폭락해 지어도 밑지지만 어쩔 수 있겠시유? 이제 어쩌나, 하면서도 계속 지을 수밖에….”
사이비 농민들에게 돌아간 구조개선자금
올 들어 6월까지 수입된 오렌지는 7만9천t. 오렌지 품목 MMA(최소시장접근. 우루과이라운드협정에 따라 한햇동안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물량)는 3만5천t이다. 그런데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의 작황이 좋아 수입가격이 지난해와 견줘 절반가격 수준으로 크게 떨어지자 해태상사와 LG상사 등 대기업에서 앞다퉈 엄청난 물량을 추가로 들여온 것이다. 지난해 상반기만 따지면 같은 기간에 올해는 무려 7배 가까이 폭발적으로 오렌지 수입이 늘었다. 이에 대해 농림부는 “완전개방시대에 민간이 수입하는 부분을 정부가 억제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WTO로부터 즉각 제재를 받는다”며 “우리 토마토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개방을 해도 경쟁력을 갖춰놓고 해야지유. 수입시기만 해도 그래요. 방울토마토가 본격적으로 출하되는 2월에서 5월 사이에 수입 오렌지가 막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방울토마토 농가는 다 죽으라는 겁니까? WTO도 밉지만, 우리 농민을 희생시켜 자기네 배만 채우는 대기업들이 더 나쁜 놈들이지유.” 불볕더위로 검게 그을린 조씨의 얼굴에 핏발이 서고 있었다. “막막할 뿐”이라며 조씨는 한숨처럼 연신 담배연기만 내뿜었다. 한동안 말을 않던 조씨가 깜박 잊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부의 실패한 농업정책을 겨냥하고 있었다. “내가 짓고 있는 방울토마토 농사가 2600평입니다. 생산비도 못 건지는 것은 냅두더라도 평당 1만원 이상 적자를 내고 있어요. 5년 동안 방울토마토만 지으라는 조건으로 정부한테 시설하우스를 받은 농가가 이 마을에 100가구가 넘어유. 햇볕 문제 때문에 이 시설하우스로는 다른 작물은 할 수도 없시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신세죠.” 주변에 즐비하게 들어선 토마토 시설하우스를 보며 조씨가 탄식처럼 말했다. “다들 빚을 갚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전 재산을 다 내놓겠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방울토마토 했다가 박살나고 있는 판국에 누가 해보겠다고 덤비겠시유?”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따라 나오던 조씨가 방울토마토 시설하우스 옆에 세워진 창고건물을 가리켰다. 이 마을 농가들이 부담한 4천만원에다 정부의 지원을 합쳐 총 1억2천만원을 들인 방울토마토 저온저장고였다. 저장고 주변에 무성한 잡초로 미뤄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음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지어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정부가 떠밀다시피 해서 지은 것인데 실제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저렇게 놀리고 있다는 것이 조씨의 설명이었다. 단국대 장원석 교수(농업경제학과)는 “정부가 농어촌 구조개선사업을 한다면서 92년 이후 지금까지 57조원을 쏟아부었지만 오히려 경쟁력 약화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모범농가에 싼 이자로 정책자금을 빌려주는 과정에서 실제 농가대표는 다 빠지고 경찰서장이다 교육장이다 해서 죄다 엉뚱한 사람만 선정위원으로 들어갔다”며 그 결과 일부 영농자금이 사이비 농민들한테 나눠져 술집 만들고 다방 짓는 데 쓰였다고 말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유상욱 사무총장은 “정부는 농가부채에 대해 농민들의 ‘도덕적 해이’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정책자금이 ‘딴 곳’에 쓰인 것도 있다. 하지만 ‘무늬만 농민’인 사람들한테 돈을 잘못 줘서 그런 것이다. 우리가 게을러서 또는 주식투자로 빚진 게 아니다. 수입개방도 그렇다. 대비를 해놓고 문을 열어야지 겨울철에 솟옷바람으로 밖에 내보내면 다 얼어죽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시골농촌은 이제서야 IMF”
다음날 경기도 평택을 찾아갔다. 평택군농민회 김동혁(31)씨는 현안으로 떠오른 한국과 중국간 마늘분쟁 얘기를 먼저 꺼냈다. “중국산 수입마늘 때문에 올해 우리 마늘값이 폭락했잖아요. 마늘에 이어 내년에는 고추가 폭락한다더라 하는 말이 흉흉하게 나돌고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마늘분쟁 협상도 공산품을 위해 농산물을 희생시키는 꼴로 가고 있잖아요.” 지금의 농정은 농업포기정책이라고 성토하는 김씨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생각해보세요. 옛날 100원이던 라면은 지금 500원으로 올랐는데 1가마에 10만원 하던 쌀은 16만원밖에 안 하잖습니까.” 시설재배로 오이와 호박을 주로 생산하는 평택군 진위면 야막리도 빚얘기를 빼면 더 할 얘기가 없다시피했다. “젊은 사람들은 저놈의 비닐 하우스땜에 코뀄어요. 농촌 구조개선이다 뭐다해서 정부에서 비닐하우스를 보급해 서울서 부산까지 다 비닐하우스 천지잖아요. 이 마을 사람들 다 하우스 땜에 빚더미에 앉았어요.” 자신의 비닐하우스 앞에서 만난 임채홍(43)씨는 이 마을 작목반 34개 농가가 평균 1억원씩은 빚을 안고 있다고 했다. 물론 빚으로 시름을 앓고 있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1200평에 오이를 재배하고 있는 그는 하우스를 시설하면서 진 빚 7천만원의 이자를 간신히 갚고 있었다. 하지만 하우스에서 나온 시설채소로는 엄두도 못내고 100마지기 논농사에서 나온 소득으로 대신 갚고 있다고 했다. 임씨의 비닐하우스 바로 맞은편에 전날 부여에서 봤던 1-2W형 하우스 2동이 흡사 농촌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이 마을 대여섯 가구가 빚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하우스를 팔려고 내놓았지만 아무리 낮은 값을 불러도 팔리지 않는다며 임씨는 긴 한숨만 토해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씨의 부인 정인복(42)씨가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었다. “시골농촌은 이제서야 진짜 IMF가 터졌어요.” 92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농촌 구조개선사업에 따라 전국 농촌에 지어진 시설하우스와 유리온실은 여의도 면적의 200배에 이르는 5만ha다. 설치비용은 정부지원과 농민부담이 각각 20%고 나머지 60%는 싼이자로 융자해줬다. 92년 이후 정부의 하우스 시설지원액은 5천억원을 넘는다. 이에 대해 농림부는 “일부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재배작물의 상품성도 높아지고 생산량도 느는 등 전체적으로 성과도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국대 장원석 교수는 “비닐하우스가 우리 현실에 적합하다고 줄곧 주장했는데도 정부가 평당 80만원까지 비용이 더 드는 유리온실을 고집하는 바람에 농민들을 빚더미에 앉혔다”고 지적했다. 생산량과 품질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정부의 말을 믿고 유리온실을 한 농민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마늘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부지 엄마가 피땀흘려 지은 마늘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엄마랑 아부지는 밥도 잡수시지 않으시고 누워계십니다. 중국산 마늘 때문이래요. 저희 농민들은 정부에 돈을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빚을 탕감해 달라는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농촌에서 생산되는 농산품을 제값 받고 팔수 있도록….” 최근 경북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에 사는 한 중학생이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이런 편지를 썼다. 현지 형편이 어떤지 물어봤다. “다들 창고에 마늘을 걸어놓고 썩히고 있어요. 지금 마늘값으로는 종자비용도 건지지 못하는데 내놓아서 뭐하겠어요.” 의성군 농민회 신택주씨는 이렇게 말했다. 간간이 전화선을 타고 신씨의 긴 한숨이 전해져왔다. “지난해 이맘때 한지형 육쪽마늘 1kg에 산지가격으로 2천원을 웃돌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고작 1100원이에요. 중국 마늘이 망쳐놓은 거지요.” 전국의 올해 마늘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1만여t 줄어든 47만여t. 과잉생산이 가격폭락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마늘 농가를 울상짓게 한 주범은 지난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시장에 쏟아져들어온 값싼 중국산 마늘이었다. 관세를 물고서도 1kg에 650원밖에 안 되는 중국산 마늘 3만5천여t이 국내에 들어오면서의 국산 마늘값이 맥을 못 춘 것이다. 중국산 수입마늘에 대해 315%의 긴급수입관세(Safe Guard. 수입물량 급증으로 국내 가격이 폭락할 경우 발동할 수 있는 조처)를 물리자 중국이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중단 조치로 맞서면서 터진 한-중 마늘분쟁은 우리쪽이 저율관세(30%)를 적용한 중국산 마늘 수입쿼터 2만t을 허용해주면서 타결됐다. 의성군 농민회는 “공산품 수출을 위해 농업을 희생시키는 이른바 ‘비교우위론’이 우리 농업을 망치고 있다”며 “중국산 마늘은 정부가 사서 폐기처분하든지 제3국에 수출하라”고 요구했다. WTO 5년, 농촌은 외국 농산물이 무차별적으로 들어와 국내 가격이 폭락하면 농가들은 이를 피해 ‘돈이 되는’ 다른 소득작물로 저마다 한꺼번에 몰리고 그래서 과잉생산이 빚어지면 또다시 가격이 폭락하는 현상이 구조화되고 있었다. 35조원에 이르는 농가부채에 짓눌린 농민들의 가슴은 극심한 가뭄에 처해 있는 벼마냥 속절없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
. | |||||
|
|